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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9번째 책] 프레임 - 최인철 (★★★★★)
    1000권 독서 2018. 8. 26. 23:32




    책 속의 한 구절


    우리도 삶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풍경을 향유하기 위해 최상의 창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프레임을 통해 세상에 접근하느냐에 따라   삶으로부터 얻어내는 결과물들이 결정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최상의 프레임으로 자신의 삶을 재무장하겠다는   용기, 나는 이것이 지혜의 목적지라고 생각한다.1

      

         우리의 모든 정신 활동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과 가정하에서 일어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관점과 기준 그리고 일련의   가정을 염두에 두고 본다는 것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 모든 과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결국 특정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모든 정신 과정을 프레임이 ‘선택적’으로 제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처음부터 전혀 보지 못하는 대상과, 고려조차 하지 못하는 선택지가 존재할 수 있다

      

         프레임의 가장 빈번한 형태는 맥락으로 나타난다. 가끔 어떤 사람의 발언을 앞뒤 맥락 다 자르고 보도하거나 보여줌으로써 진의를   왜곡하는 ‘악마의 편집’이 문제가 되곤 하는데, 이는 맥락이 얼마나 강력하게 프레임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되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어떤 경우에라도 다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수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존재다. 프레임의 변화, 즉 맥락의 변화는 이처럼 우리에게 다양한 얼굴들을 만들어낸다

      

         프레임은 대상에 대한 정의다. 따라서   프레임을 바꾼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정의를 바꾼다는 의미다.

      

         노인의 행복도가 젊은이의 행복도보다 결코 낮지 않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노인들이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들이다. 젊은이들은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면, 매   순간순간이 중요해진다.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테이블리스트(table-ist, 식탁주의자)’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테이블리스트는 영어 사전에 없는 단어인데, ‘식탁에서만   먹는 사람’을 뜻한다. 소파에서도 먹지 않고, 연구실에서도 먹지 않고, 오직 식탁에서만 먹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들어본 단어였다.

      

         사전에는 거의 모든 사물들에 관한 정의가 실려 있다. 辭典이 死典이 되어가는 이 시대,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새로운 사전이 필요하다. 사물과 상황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다시 내려보는 것, 그것이 프레임을 바꾸는 길이다.

      

         대상에 대한 정의가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은 정의다’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프레임은   단어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대상을 지칭할 때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는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프레임을 결정하는   중요한 행위다.

      

         프레임이 질문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질문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순서 역시 이에   못지않다.

      

         평소에 자신이 자주 던지는 질문을 점검해야 한다. 자기   삶에 대한 평가가 시시하다면 내가 시시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답이 안 나오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질문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무언가 더 나은 답을 찾고 싶은 사람은 세상을 향해 던지고 있는 질문부터 점검해야 한다.

      

         “나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눈다.”

      

         바버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성공한 사람인지 힘 있는 사람인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배우고 있는   사람인지 배우기를 멈춘 사람인지가 궁금하다

      

         문재인   후보는 야권 단일 후보로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안철수 후보는 “박근혜 후보와의 대결에서 경쟁력 있는 후보는 누구인가?”를 택해서 여론   조사를 진행하고 싶어 했다.

    얼핏 보면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지만, “누구를   지지하느냐?”와 “누가 경쟁력이   있느냐?”라는 질문은 두 후보를 평가하는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개인, 가정, 조직, 국가에는 나름의 은유가 작동한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은유는 우리가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 은유 속에 살고 있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프레임을 바꾸고 싶다면 바로 그런 은유를 찾아내서 바꾸어야 한다.

      

         개인이나 조직이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들의 프레임을 알 수 있다. 김난도 교수의 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에는 하루를 인생 시계에   비유하는 대목이 나온다. 인생을 80이라고 보면 마흔 살은   12시에 해당하고, 스무 살은 겨우 아침 6시에 해당한다. 스무 살에 좌절하고 있는 청춘을 향해 김난도 교수는 매섭게 야단친다. “아침   6시에 오늘 하루가 절망이라고 좌절하는 그대는 제정신인가?”라고.

      

         우리의 하루를 마음대로 설계할 수 있다면 경험의 순서를 현명하게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만일 안 좋은 일과 좋은 일을 하나씩 경험할 수 있다면, 무엇을 먼저 경험하겠는가? 대체로 안 좋은 일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 낫다. 안 좋은 일 다음에 경험하는 좋은 일은 더 달콤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뒤에 경험한 좋은 일이 앞에서 경험한 안 좋은 일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 지닌 프레임이다. 이 환경미화원 아저씨는 자신의 일을 ‘돈벌이’나 ‘거리 청소’가   아니라 ‘지구를 청소하는 일’로 프레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를 청소하고 있다는 프레임은 단순한 돈벌이나 거리 청소의 프레임보다는 훨씬 상위   수준이고 의미 중심의 프레임이다. 행복한 사람은 바로 이런 의미 중심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의미 중심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그냥 하루하루   대충 사는 거지 뭐”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사는 건 자명하다.

      

         상위 프레임은 왜 이 일이 필요한지 그 이유와 의미, 목표를 묻는다. 비전을 묻고 이상을 세운다. 그러나   하위 수준의 프레임에서는 그 일을 하기가 쉬운지 어려운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등 구체적인 절차부터 묻는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표나 큰 그림을 놓치고 항상 주변의 이슈들을 좇느라 에너지를 허비하고 만다.

      

         History는   ‘His+Story’의 합성어가 아니다. History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탐구를 통해 배우는 행위’라는 뜻이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프레임하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프레임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작가가 작품 사진을 찍지 못하는 이유가 사진기의 성능에 있다기보다 ‘멋진   장면’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같은 물건을 사면서도   경험 프레임을 갖고 구매하는 사람은 그 물건을 통해 맛보게 될 새로운 경험에 주목한다. 그러나 소유 프레임을 갖고 구매하는 사람은 소유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책상과 의자를 구입하는 경우, 소유의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가구를 장만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남들보다 더 좋은   가구를 소유하려 한다

      

         경험을 위한 구매가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57%였고, 소유를 위한 구매가 더 행복하게 해줬다는 응답은 34%에 불과했다

      

         설문 조사를 수행한 심리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경험을 위해 구매한 물건’은 대부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것들이다. 누군가와 함께 콘서트를 관람하고 여행을 가는 것, 혼자 관람하더라도 연주자들의 탁월한 연주 솜씨에 감동하면서 그들과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이처럼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의 경험들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현명한 소비자는 소유보다는 경험의 프레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에리히 프롬의 충고처럼 소유의   프레임보다 경험의 프레임이 삶의 질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식욕이 식사량을 결정하기보다 그릇의 크기가 식사량을 결정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그것은 그릇의   크기가 프레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제시되는 양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평균적인 양’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프레임은   질문의 방향과 같은 아주 사소한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내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현실 사이에는 어떤 왜곡도 없다고   믿는 경향을 철학과 심리학에서는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이라고 한다.   소박한 실재론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선택한 것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선택할 것’이라고 믿는다.

      

         자기중심적 프레임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을 ‘허위 합의   효과(false consensus effect)’라고 하는데 자신의 의견이나 선호, 신념, 행동이 실제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착각하는 자기중심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심리학자 레비츠키(Paul Lewicki)의 연구에   따르면 타인을 능력 차원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도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정의할 때 능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평가하게 된다. 반면에 자신을 정의하는 데 있어 ‘따뜻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타인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본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평가나 내용을 보면,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많이 드러낸다. 그러니 자기 주변에 남을 헐뜯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주변 사람이 실제로 남을 헐뜯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남의 허물을 습관적으로 들춰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마음속에 CCTV를 설치해놓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제 그   CCTV 스위치를 꺼버려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을 조용히   내려놓는다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일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인은 짧은 시간에도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이지만, 나 자신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복잡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나는 한눈에 척 보면 너를 알지만, 너는 척 봐서는 나를 모른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특징적인 몇몇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걷는 모습, 머리 스타일, 옷 입는 스타일, 목소리 크기, 글씨체, 좋아하는 색깔, 자주 듣는 음악···. 이런   단서들이면 충분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일대의 만(Mann) 교수는 이 현상이 개인의 본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군중이라는 상황 때문에 발생하는 데 주목하고,   이런 군중을 가리켜 ‘미끼 군중(baiting crowd)’이라고   불렀다.2 개인이 군중이라는 상황 속에서 경험하는 자아 실종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몰아(沒我, deindividuation)’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군중이라는 거대한 바닷속으로 개인의 정체성이 침몰하고 마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각 개인의 내면만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도덕이 패륜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거대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도   옳지 않다. 그보다는 행동할 당시의 상황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람 프레임만을 사용한다면 다수의 의견에 가끔씩 동조하는 보통의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비난하게 된다. 또한 소신을 지키는 소수의 사람들을 발굴하는 것으로   상황을 개선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해결책은 집단의 다양성을 보장하여 우리 모두의 소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상황 프레임으로   세상을 볼 때 가능한 일이다

      

         ‘타인에게는 나 자신이 상황이다’라는 인식을 갖는 것.

    다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내면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상황 때문에 기인한다는 깨달음.

    그것이 지혜와 인격의 핵심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기대는 먼저 우리의 행동을 바꾼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그에 반응하는 타인의   행동을 바꾼다.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저 사람은 원래 그렇구나. 내 생각이 맞았어’라고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한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내 선입견이 먼저 내 행동을 바꾸고, 그 행동이   타인의 행동을 바꾸는 이 위험한 순환을 인식할수록 우리는 지혜로워질 것이다.

      

         어떤 이는 존재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탁월하게 만들지만, 어떤 이는 존재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주저앉게   만든다.

      

         탁월한 사람들 옆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탁월해질 가능성이 높다.   안주하는 사람들 옆에서 시간을 보내면 안주하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중 누군가는 탁월함 유발자이고, 누군가는 안주함 유발자인   셈이다.

      

         행복이 개인적 선택인 동시에 사회적 책임 행위라고 인식을 확장하게 되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내가 상황이다’라는 프레임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다.

      

         자발적 하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하지만, 그중 하나는 스트레스 상황에 대비하여 몸의 경계 태세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하품을 하면 뇌로 공급되는 혈액이 증가하고, 뇌의 옥시토신 수준이 증가한다. 이는 뇌의 각성 수준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자꾸 하품이 나오는 이유, 치과 치료를 앞두고 긴장감에 하품이 나오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노력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프레임을 바꾸어놓는다.

    좋은 프레임은 나를 바꾸는 역할을 하지만, 그렇게 바뀐 나는 빛나는 C가 되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프레임이 될 수 있다. ‘저런 못된 사람에 비하면 나 정도는   괜찮다’는 소극적 위안과 안일함을 유발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저 사람처럼 사는 게 정말 잘 사는 거야’라고 기준을 바꿔주는   C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상황이다’를 굳이 강조하고 싶었던 이유다.

      

         현재에만 존재하는 결과론적인 지식이 과거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착각하고 ‘내 그럴 줄 알았지’ ‘난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심리 현상을 ‘사후 과잉 확신(hindsight bias)’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런 현상을 선견지명 효과에 빗대어 ‘후견지명(hindsight) 효과’라고   부른다. 여기서 ‘hindsight’는 영어의 ‘behind’와 ‘sight’가 결합한 말로, 글자 그대로 결과를 알고 난 후에 ‘뒤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의미다.1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데 ‘설명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 능력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부작용이 있는데, 바로 어떤 결과든 사후에는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결과에도   좀처럼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당연시하며 그 일이 처음부터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할 때, 우리는 현재   프레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현재 프레임’이 만들어낸   그럴싸한 포장일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후에 내리는 모든 판단에 대한 확신을 지금보다 더욱   줄여야 한다.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 ‘내가 진짜 알았을까?’라고 솔직하게 자문해봐야 한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어?’라고 아랫사람을 문책하기 전에 ‘정말 나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라고 다시 자문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그러지 않았는데’ ‘우리 땐 안 그랬는데’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관계를 얼어붙게 만든다. 이런 말처럼 근거 없는 표현도 없다. 자녀에게, 젊은 학생들에게, 아랫사람에게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저   나이 때 난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정말 그랬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지 않은 존재들은 과거 자신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롭고 강했는지를 떠올리며   현재를 보호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과거는 실제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의 질은 미래 감정에 대해 우리가 현재 내리는 예측의 정확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에 질병이 들어왔을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면역체계가 존재하듯이 마음에도 심리적 면역체계가   존재한다. 실제로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심리 면역체계는 분주히 움직여서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스스로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지혜로운 경제생활의 출발은 돈에다 이름을 붙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특히 공돈이라는 이름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미 공돈이라는 이름이 습관이 되어 있다면 사회심리학자 토머스 길로비치(Thomas Gilovich)의 조언대로 해보라.

    “공돈을 은행에다 2주간만   저축해놓아라.”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동안 그 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돈’이라는 이름에서 ‘예금’이라는 이름으로 심리적   돈세탁이 이루어질 것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돈을 아끼게 될 것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큰돈을 푼돈처럼 만들어주는 ‘평생   한 번인데’라는 장기적인 프레임을 가져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배고픔에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 한 명을 살리는 데 드는 돈은 평생의 관점에서   보면 푼돈에 불과하다. 가족들과 함께 가는 여행 경비도 평생 관점에서는 푼돈이다. 이렇게 프레임을 바꿔보는 것도 지혜로운 삶의 한 방편이다.

      

         세일 기간에 이뤄지는 충동구매의 대부분은 ‘원래 가격’이라는 이름의 함정에 넘어간 결과다. 원래 가격표에   50만 원이 붙어 있는 물건을 20만 원에 사면 사람들은 30만 원을 벌었다고 착각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이게 원래 얼마짜린 줄   알아?” 하면서 되레 큰돈을 절약한 것처럼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당신은 30만 원을 번 것이 아니라 20만 원을 지출했을 뿐이다. 쇼핑을 마친 뒤, 예금통장에 실제로   30만 원이 입금되는   기적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어리석은 소비자는 늘 원래 가격표를 찾아서 헤맨다. 그래서 지혜로운 상인은 세일 품목에다 원래 가격표를 늘   붙여놓는다.

      

         경제적 합리성의 기본은 돈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공돈’이라는 이름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차피 없었던 돈’ 혹은 ‘어차피 쓰려고 했던 돈’이라는 이름도 없다. ‘이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는 표현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만 충실히 지켜도 경제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불행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불행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보통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복권에 당첨되어 하루아침에 큰 부자가 된 사람도   우리가 예상하는 것만큼 행복하지만은 않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예측이 이처럼 실제와 다른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적응 능력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어떤 ‘상태’에 신속하게 적응한다.

      

         살아가면서 주기적으로 내려야 하는 무수한 선택들, 어떤   신문을 구독할 것인지, 어떤 우유를 먹어야 할 것인지, 어떤 휴대폰을 구입하고, 어떤 자동차를 선택하고, 어떤 보험을 들어야 할 것인지···.   반복되는 이런 결정을 내릴 때마다 대부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같은 제품과 서비스를 유지하는 쪽으로 선택하고 만다.

      

         지혜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태로 주어져 있는 대안을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 심지어 기존의 직업까지도 처음 접하는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해서 본다면 아마도 많은 선택들이   달라질 것이다.

      

         혐오 시설의 건립을 놓고 해당 지역 주민들과 정부 또는 기업 사이에 보상액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프레임의 차이 때문이다. 해당 주민들에게 ‘토지’는 그냥 토지가 아니라 ‘내 토지’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건강의 위협도 일반적인   위협이 아니라, 직접적인 ‘내 건강’의 위협이고 ‘내 생태계’의 위협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 주민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의 눈에는 그냥 ‘토지’이고   그냥 ‘생태계’이며 그냥 ‘건강’인 것이다. 따라서 해당 주민들의 보상 요구를 단순한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세워 비난만 하는 것은 프레임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경솔한 행동일 수 있음을 기억하라.

      

         영어의 ‘savoring’이라는 말은   ‘현재 순간을 포착해서 마음껏 즐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프레임은 준비기로서 희생하는 현재가 아니라 ‘savoring’ 대상으로서의 현재다.3

    ‘한 끼 대충 때우자’는 식으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한 한 끼 식사를 아무렇게나 홀대하지 말고, 그 음식   속에 들어간 재료의 맛을 하나하나 음미해보라. 축하할 일이나 축하해줄 일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서 마음껏 축하받고 축하를 해줘라.   ‘지금 여기’의 프레임으로 현재의 순간을 충분히 즐겨라.

      

         진정한 마음의 자유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데 있다. 저자가 속한 연구팀에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타인과의 비교는 설령 그 대상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도 너무 자주 하게 되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들과의 횡적인 비교보다는   과거 자신과의 비교 혹은 미래의 자신과의 종적인 비교가 하나의 대안이 된다.

    과거의 자신보다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 자신이 꿈꾸고 있는 미래의 모습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상의 비교가, 남들과 비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 결론이다.

      

         누군가 이런 체념적 말을 던졌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얼마나 순식간에 탁월함에 대한 추구가 사라지는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들이 갖고 있는 무서운 전염성의 위력에 공감할 것이다. 특히 부모와 교사, 상사들은 자녀와 학생들, 부하 직원들   앞에서는 절대로 이런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행복은 소유 자체를 위한 소비보다는 경험을 위한 소비를 했을 때 더 크게 다가온다.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습관적으로 식사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음식에 들어간 재료들을 음미하는 미식가로서의 경험을 추구해보라. 영화를 볼 때도 단순히 흥행 영화를   한 편 본다는 프레임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해낸 작품을 감상한다는 차원으로 프레임을 해보라. 특히 나를 위한 것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 행복을 배가시킨다는 점을 기억하라.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건 ‘어디서’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의 문제다. 이제 이 프레임으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어디서’의 문제로 주눅 드는 시시한 삶은 미련 없이 버려라. 내게 위안과 용기, 힘을 주는 존재, 내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가 행복한 인생의 지표이자 목적일 수 있다.

      

         세상이 나에게 제시해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한다.   부사를 줄이는 작업이란 바로 그런 일이다.

    작가의 프레임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삶의 매 순간이 문장이다. 문장이 살아 있어야 삶에 생명력이 있다. 글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이지, 부사가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을 때 경험하는 절대 겸손, 자기중심적 프레임을 깨고 나오는 용기, 과거에 대한 오해와   미래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 지혜, 그리고 돈에 대한 잘못된 심리로부터의 기분 좋은 해방.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의 마음속에 꼭꼭 채워주고   싶었던 지혜의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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