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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번째 책] 판사 유감 - 문유식
    1000권 독서 2018. 7. 8. 19:14


    책 속의 한 구절

    [1]
         솔직히 난 판사, 검사, 의사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라 생각한다.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만 이런 ‘폼 나는 직업’을 갖게 되지만, 이들의 일상은 인간의 가장 어둡고, 비참하고, 더러운 것과 정면으로 부딪혀 견뎌야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웬만한 멘탈 아니면 참기 힘들다. 밤마다 폭탄주를 마시며 겨우 버티는 이들도 많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책을 내기로 한 이유는 결국 제가 그러고 싶어서입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요, 그냥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가 있더라고요.
      
    [3]
          “피고인, 평생 그런 식으로 없는 친구나 친척을 내세워 범행을 반복했는데 또 그 이야기입니까? 교도소 콩밥도 국민의 혈세로 마련하는 겁니다. 피고인에게는 콩밥도 아깝습니다!”
      
    [4]
          “판사님, 콩밥도 아깝다니요? 저는 이 나라 국민도 아닙니까? 사람도 아닙니까?”
    저는 움찔했습니다. 그래도 겉으론 태연한 척하며 일단 재판을 다음 기일로 속행시키고 법정을 나왔습니다.
    그날 밤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습니다. 제가 무슨 권리로 남을 그렇게 모욕할 수 있겠습니까
      
    [5]
         저는 어리석게도 이 작은 집에 흐르는 안온한 분위기와 아이들의 밝은 겉모습만 보고는 아이들이 짊어진, 여느 어른들보다도 가혹한 삶의 무게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서 가정을, 엄마와 아빠를 빼앗아 간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돈이었던 것입니다.
      
    [6]
         마음속으로는 억장이 무너졌지만 값싼 감상과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보일 만큼 아이들이 자기들이 짊어지고 있는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저는 이들을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른에게 법률상담하듯이 제가 아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다 보니 헤어지기 전에는 보다 밝은 토론도 잠시나마 할 수 있더군요.
      
    [7]
         세상은 참 재미있습니다. 빚 때문에 남들과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 순진한 아이가, 자기 빚을 떼일까 겁이 나 목청을 높이는 돈 많고 힘 있고 유식한 어른들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저 말을 유식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어로 하면 바로 ‘모럴 해저드’ 아닙니까. 유식한 사람들은 숫자나 어려운 말로 모든 것을 자신 있게 결론 내리기를 좋아합니다
      
    [8]
         2002년 삼사분기 이후 드러난 신용불량자의 급증은 주로 신용카드회사의 ‘도덕적 해이’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는 겁니다. ‘모럴 해저드’라는 말은 이럴 때도 쓰는 것이더라고요.
      
    [9]
         미국의 파산자 중 상당수는 맞벌이로 상당한 소득을 올리는 중산층이라는 겁니다. 소득이 올라갔는데 웬 파산이냐고요? 요약하면 소득이 올라가는 것보다 고정지출이 늘어나는 것이 훨씬 많아서 여유 자금이 이전보다 훨씬 줄어든 빡빡한 삶을 살다가 실업, 급여 감소, 질병 등 변동 요인이 발생하면 곧바로 파산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10]
         제가 보기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파산자들의 종류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 가족이 빠듯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가까스로 충당하다가 실업, 질병 등의 이유로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조금이라도 잘살아 보고 싶어서 돈을 벌어 보려고 이것저것 애쓰다가 망해 버린 사람들, 자기도 자기 앞가림만 겨우 하는 처지에 그놈의 ‘정’과 ‘핏줄’에 매여 있는 한민족으로 태어난 죄로 부모형제, 친지의 빚보증을 어쩔 수 없이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
      
    [11]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제가 배운 것입니다.
      
    [12]
         법원에서는 주로 잘못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거나, 누구보고 누구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거나, 남의 집을 팔아 빚을 받아 주거나 하는 일을 합니다. 모두 사회를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개인파산, 개인회생사건 한 건 한 건은 한 사람을, 한 가정을, 한 아이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회사정리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회사가 살아나면 주주도, 근로자도, 협력업체 사람들도 살아납니다. 파산부는 회생부이기도 한 것입니다.
      
    [13]
         그런데 그 순간, 피고인의 마지막 한마디가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용서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저에게 더 깊은 고민을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중학교 2학년 때 소년원을 시작으로 인생의 절반을 옥살이로 허비한 그의 커다란 덩치 안 어딘가에, 잘못은 했지만 한 번만 용서받고 싶었던 어린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거지요.
      
    [14]
         피고인은 일생 단 한 번도 용서받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제 처음이자 마지막일 용서를 받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피고인은 자신에게 감옥살이가 아무 의미도 없고, 치료와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달라지려면 먼저 스스로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일 것이다. 이번에 받는 형벌의 의미는 피고인이 진정 새사람이 되기 위하여 먼저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 이후에 비로소 치료도, 사회의 도움도, 피해자의 용서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15]
         현실은 영화와 다릅니다. 모든 갈등에는 빙산처럼 수면 밑에 더 거대한 뿌리가 있고, 해피엔딩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재판에서 최대한 갈등 당사자 모두의 속마음을 털어 놓도록 했는데 그 결과 오히려 갈등이 더 깊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16]
         근본 대책 없이 실형을 살려 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일만 반복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재범의 위험성이 높다고 사고도 내지 않은 단순 음주운전을 위험성 때문에 징역 10년씩 선고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17]
         벌금이나 집행유예는 형벌도 아니고 실형만이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적어도 징역 10년 이상은 되어야 어느 정도 엄벌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 중한 범죄에 대하여는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하는 형벌만이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경우 등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입장을 ‘엄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8]
         문제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엄벌주의’가 범죄율을 낮추는 특효약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엄벌주의’로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형사정책적으로 입증되었다면 지금도 대다수의 문명국가들에서 빵 하나를 훔쳐도 평생 감옥에 가두는 식의 형벌체계를 유지하고 있겠죠. 하지만 선진국 중 우리나라보다 전반적인 형벌 수준이 높은 나라는 미국과 싱가포르 정도뿐입니다.
      
    [19]
         평생 처음으로 자유를 구속당하여 남들이 쳐다보는 쇠창살 속에 수감된 사람들은 그 기간이 단 하루, 아니 몇 시간만 되어도 엄청난 공포와 좌절감, 자기모멸과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정치범, 양심범, 장기수 등이 상대적으로 수감생활을 잘 견디는 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최대 요소의 하나인 ‘자기모멸’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20]
         인간이란 자기의 잘못과 치부를 공개적으로 지적당하고 멸시받는 경험을 하면 자아의 일부분이 파괴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대응하죠. 자존을 상실한 채 무조건 순종하고 눈치를 보든지, 자존을 억지로라도 지키기 위해 자기의 잘못을 끝까지 합리화하고 사회를 적대시하든지···. 더 나아가 길든 짧든 타인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시되는 삶을 경험하고 나면 이후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21]
         엄벌주의에 비하여 범죄율을 낮추는 데 보다 효과적인 것은 오히려 ‘필벌주의’일지 모릅니다. 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면 충동적 범죄를 제외한 일반 범죄의 범죄율은 상당히 떨어집니다
      
    [22]
         문제는 ‘필벌주의’는 양날의 검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언제나 완벽히 충족되지 않는 욕구 아래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이나 투쟁을 하는 존재이기에 모든 사람이 규칙을 완벽하게 준수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3]
         범죄 역시 인간사회의 다른 모든 위험과 마찬가지로 절멸의 대상이라기보다 관리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범죄를 절멸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또 다른 위험을 낳기에 적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범죄를 관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4]
         손쉽게 국민과 언론의 박수를 받는 길은 피고인을 파격적인 중형에 처하는 길입니다. 피고인을 엄벌에 처하라는 빗발치는 여론의 압박과 피 끓는 유족의 호소, 검찰의 높은 구형 가운데, 모든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예외적인 중형을 선뜻 선택하지는 못하는 법관의 고뇌는 결코 국민의 법감정을 무시한 오만은 아닙니다.
      
    [25]
         마음이 무겁기만 한 것은 솔직히 중형을 선고하는 일이 참으로 무거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오판이 있을 경우 무고한 피고인에게 더욱 가혹한 고통을 가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갈수록 재판을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기에 감히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어느 하나 없는데도, 맡은 소명은 주어진 증거의 테두리 내에서 판단하여 입증이 되었다고 판단하면 피하여 가지 말고 명확히 정의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6]
         오판으로 누군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죄는 무간지옥에서 영원히 속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늘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법정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27]
         물질적인 부가 인간의 가치까지 결정해 버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부의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기만을 희망합니다. 아파트 평수 늘리기, 서울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한 걸음씩 이사 가기, 자동차 배기량 늘리기가 한 인간의 자아 성장인 시대.
    그나마 다들 조금씩이라도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고속 성장기에는 마약처럼 그 가속도에 취해 버티지만, 그 속도가 더뎌진 후에는 자신의 인생 자체가 실패인 것 같은 좌절감과 분노만이 남게 됩니다.
      
    [28]
         판사는 3D 직종이랍니다. 이런 사연들만 보면서 살다 보면 인간에 대한 절망과 냉소에 빠지게 돼요. 그래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나약함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아야겠죠. 그래서 답을 찾을 능력도 없는 주제에 구원은 없을까 고민하게 되곤 합니다.
      
    [29]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경계와 대책은 필요하지만 빈부 격차 자체를 소멸시킬 수는 없다.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 잘살게 되는 것만을 사회의 목표로 삼게 되면 그 힘든 목표가 도달될 때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불행하다.
    빈부 격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지금 당장 보다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귀의 허기처럼 충족될 수 없는 물질적 욕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다른 행복의 가치를 일깨워야 한다.
      
    [30]
         부유층이 마약 사건을 일으켜 법정에 서는 경우를 볼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것은 ‘권태’입니다. 이것저것 다 해 보니 좋은 차를 타든 맛있는 것을 먹든 여행을 가든 시큰둥하고, 조금이라도 더 큰 자극을 찾다 보니 마약으로 뇌를 속일 수밖에요.
    뭘 해도 감동도 설렘도 없는 삶이란 겉만 번지르르한 지옥이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도 법정이 주는 배움의 하나입니다. 법정 스님 도움이 필요 없지요.
      
    [31]
         부의 분배는 불평등해도 행복은 평등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의 기본 전제만 충족시켜 준다면 말이죠. 중국집 짜장면이라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외식하러 갈 수 있어야 하고, 싸구려 카세트로라도 아름다운 음악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을 교육받아야 하고, 기차 삼등석을 타고라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가가 주어져야 합니다.
      
    [32]
         삶에서 다양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을 바로 지금,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주는 것이 직업 교육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33]
         외견상 물증이 갖추어지고 범행 동기와 인과 관계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보여도, 정말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범인의 변명이 진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형사법적으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떠올리게 하지만 보다 철학적으로는 과연 인간은 객관적 진실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34]
         우리가 직접 1차적으로 체득하는 지식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 지식의 원천은 타인의 논거와 결론을 2차적, 3차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여러 다리를 건너온 것일수록 내용이 축약되고 오도될 가능성도 많지요. 그나마도 우리의 지식은 직접 인용도 아니라 재인용, 재재인용이며 그것도 검증 없이 스쳐 지나가며 입력된 것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엄밀히 준별하지 아니한 채 확실한 지식이라고 착각하며 자기 자신의 결론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35]
         한국경제가 어떻고, 미국의 네오콘이 어떻고, 보수와 진보가 어떻고 하며 거창하게 나누는 이야기 속에 담긴 지식의 원천을 냉정하게 추적해 보면 인터넷 어느 블로그에 누가 쓴 이야기, 신문 기사, 만화책에서 본 것, 영화에서 본 것, 누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등일 경우가 많습니다.
      
    [36]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해 평생을 가르쳤는데, 한국의 인터넷상에는 약관 20대에 한국경제의 모순 구조, 국제사회의 역학 관계, 한국근현대사의 진실, 국제과학계의 파워 게임과 음모 등을 훤하게 꿰뚫는 현자, 예언자들이 득시글거립니다.
      
    [37]
         요즘 새삼스레 드는 생각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의 편 가르기는 다 본질과 직결되지 않는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고, 진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것입니다.
      
    [38]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성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39]
         우리는 어떠한 근거로, 어떠한 고민 끝에 어떤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이를 남에게 이야기해 왔습니까?
      
    [40]
         무지한 대중들은 전문가 집단이 하는 일에 감히 토 달지 말고 순종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견을 피력하되 자신의 의견과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자기 검증을 되풀이하며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 말하자는 것입니다.
      
    [41]
         소영웅주의와 귀차니즘이 판치는 사회는 어떤 면에서 독재국가보다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후자에 존재하던 자생적인 비판적 지성이라는 희망이 전자에는 고사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42]
         기본적으로 한국의 법학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의 탑을 쌓아 놓고, 그 완결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하고는 실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일하면서 알아서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개념들에 꿰어 맞추든지 뭐 알아서 하라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43]
         한국에서는 개념, 연혁, 요건, 기타 등 준비 운동만 심하게 하다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실제 수영장에는 뛰어들지도 않고 돌아오곤 했었는데, 여기서는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가 준비 운동할 시간도 안 주고 바로 미국 역사상 최악의 회계 부정 스캔들로 불리는 엔론 사건의 사례를 분석했다가, 이번 주에는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률 개정안과 각 이익 집단의 로비 내용을 소재로 특정 제도의 배후에 있는 이해관계의 대립을 토론했다가 하니 이건 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바로 물에 쳐 넣고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헤엄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지요.
      
    [44]
         이런 풍토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모든 질문을 존중하는 교육 방식인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말이 되든 안 되든 정말 주저 없이 질문을 참 많이들 하고, 교수는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적절히 코멘트하고 반문하며 생각을 이어 나가게 합니다.
      
    [45]
         더 중요한 차이는 이곳에서는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인 것이죠.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46]
         다른 것이 있다면 각자의 일에 대한 존중인 것 같습니다. 자기 일을 소중히 여기기에 남의 일도 존중합니다. 그 일에 관한 한 그 사람의 권한과 판단을 존중해 줍니다. 아무리 바빠도 민원 창구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창구에 자기 서류를 들이밀며 빨리 해 달라고 빽빽 소리 지르는 경우는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1미터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다가 다음 사람 오라는 허락이 떨어져야 앞으로 갑니다. 은행에 가도, 슈퍼 계산대에서도, 지하철 매표소에서도 손님은 왕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이 왕입니다.
      
    [47]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어떻게 살 것인가, 왜 그렇게 살 것인가,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보다 그런 고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인생의 지름길로부터 이탈하지 말고 눈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릴 것을 강요한다면,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서 골인했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그냥 깃발만이 꽂혀 있는 곳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후의 삶은 허무해서 어쩌지요?
      
    [48]
         과연 우리나라의 대치동 사교육, 특목고 수월성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세계의 젊은 엘리트들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을까? 한참 지성이 성장할 나이에 무의미한 지식만 주입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고 주체적인 지성이 성장할 여유를 주고 있는 걸까?
      
    [49]
         이 잠재력 있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의 문화유산인 고전을 읽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스스로 미쳐 보는 것, 어른들의 낡은 논리가 아니라 말이 되든 안 되든 자신만의argument(주장, 논증)를 만들어 보는 것 아닐까? 무엇보다 끊임없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대하여 왜? 왜 이렇게 해야 하지? 하며 의문을 가져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50]
         원맨쇼형의 문제는 대체로 재미있고 유익한 말씀이지만 이야기는 대부분 네버 엔딩 스토리인지라 듣다가 지치고,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나머지는 들으며 맞장구만 쳐야 하는 수동적 지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죠. 말씀하는 분은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어 잘 모르겠지만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미 듣는 이들이 듣는 척만 할 뿐 시선은 시계로만 가게 마련입니다.
      
    [51]
         대화 참가자 중 한 명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대화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하면 적절히 마이크를 넘기는 기술도 시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판사는 어떻게 생각해?”,  “아, 근데 김 판사님도 그 책 읽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기분 나쁘지 않게 말이 길어지는 사람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가는 것은 정말 고난도의 스킬이지요. 고기 굽는 것 이상의 칼날 같은 타이밍을 요합니다.
      
    [52]
         결국 ‘대화의 기술’이란 별것이 아니고 배려와 역지사지인 것 같습니다. 말하는 내 입장보다 먼저 듣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하려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53]
         다 귀찮고, 남이야 어떻게 보든 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속 시원히 맘껏 다하면서 살련다 하는 분들은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심야의 지하철 2호선, 한적한 좌석에 앉아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옆자리에 앉은 죄 없는 학생이나 아가씨를 붙잡고 한참 동안 고성으로 훈계를 늘어놓고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노인의 모습을.
      
    [54]
         이런 사소한 실수들은 사소하지만 판결문 전체에 대한 신뢰를 대폭 떨어뜨리니 큰 손해입니다. 기초 공사, 철골 공사 등을 다 잘해 놓고 마지막에 문고리를 비뚤게 달거나 페인트를 칠하다 만 꼴이죠.
      
    [55]
         정말 하기 싫겠지만 그래도 판결을 다 쓴 후에는 무조건 한 번 더 꼼꼼히 읽어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10시간 고생해 놓고, 10분 투자 안 해서 폄하당해서야 되겠습니까.
      
    [56]
         미국식 글쓰기는 철저히 두괄식이지요. 이슈와 자기 결론을 먼저 분명히 제시하고, 그 근거를 상세히 설명하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결론을 강조하는 구조입니다.
      
    [57]
         워낙 자기주장이 강한 서구 문화와 달리 겸양이 미덕인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결론을 처음부터 강하게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가 조금이라도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질문을 잘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겠지요.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떤 어리석은 질문이라도 타박하지 않고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58]
         자기 결론이 틀렸다고 비판받더라도 그건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자기 방어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 봐서 수긍이 가면 바로 쿨하게 시인하고 결론을 바로 수정하면 되지요.
      
    [59]
         소신 강한 사람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얼마나 오류에 빠지기 쉬운지를 생각한다면 언제나 자신의 결론이 잠정적인 것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주저 없이 결론을 수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60]
         사람들은 ‘논리’나 ‘당위’로 절대로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해야 비로소 변화하지요.
      
    [61]
         문제는 재판이라는 사법 서비스의 수요자는 재판 당사자, 즉 국민인데 얼마나 열심히 좋은 재판을 해서 당사자가 만족했는지는 쉽게 비교 가능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건 처리 수 통계, 판결문의 길이와 형식 등 법원 내부에서 평가받기 쉬운 양적인 측면에만 경쟁이 집중되기 쉽다는 것이죠.
      
    [62]
         인간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고 나머지는 이를 위한 수단일진대, 승진이 과연 투입 비용 대비 효율이 있는 수단인지도 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저는 일찍 대법관이 되는 분들이 가장 불행한 법관이라고 봅니다. 갈수록 고령화되는 사회에서 미국처럼 고령의 정년까지 은퇴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법관직의 가장 큰 장점으로 점점 대두될 텐데, 미국과 달리 연임도 되지 않는 우리의 대법관은 너무 일찍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고, 업무는 과중하며, 인사청문회 때마다 퇴직 후 개업하지 않을 것에 대한 약속을 요구당할 테니까요.
      
    [63]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
      
    [64]
         나는 호모 루덴스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65]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고민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프로페셔널들에게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걸 안 하는 자들을 질타할 일이지 그걸 한다고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66]
         판사의 일이라는 것이 응급실 의사처럼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피맺힌 하소연을 매일 들어야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심장이 얼어붙은 냉혈한이라도 외면할 수 없는 비극이 있고, 아무리 지독한 에고이스트도 무관심할 수 없는 부조리가 있습니다.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세상 어느 누구라도 울컥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 사연들을 가끔이라도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67]
         고민에 그칠 뿐, 무력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도 방법이 없는 일이 많은데, 하물며 최선을 다하지도 못할 때가 많고요. 치워도 치워도 또 쌓이는 눈처럼 처리할 사건은 끊이지 않으니 결국 고민도 무뎌지고 일은 일일 뿐 자기 살길부터 찾게 됩니다.
      
    [68]
         갈수록 우리 사회는 서로를 불신하고,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눕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선자라고 이를 갈며 증오합니다. 세상이 반반으로 갈라져 증오하는 불행한 시대에 나이브한 개인주의자인 저 같은 자들은 설 곳이 없습니다. 그저 혼자 생각합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는데, 세상 모든 것의 본질은 밥그릇 싸움이고 결국 모두가 이기적인 것을 굳이 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버리면 어떨까.
      
    [69]
         Anyone can be cynical.
    냉소적으로 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Dare to be an optimist.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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