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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3번째 책] 나의 한국현대사 - 유시민
    1000권 독서 2018. 7. 11. 22:56


    책 속의 한 구절



    [1]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 국민들은 베트남전쟁 파병이 정치적·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였는지 여부에 대한 토론을 기피한다. 국군이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 대해서는 잘못된 과거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라고 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잘못된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것은 완강히 거부한다.

      

    [2]

         삶에서 안전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내가 보고 겪고 참여했던 대한민국현대사를 썼다

      

    [3]

         2012년 대선의 실체는 ‘역사전쟁’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극단적으로 갈라진 세대별 투표성향은 한국현대사를 대하는 감정과 태도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4]

         나는 고령 유권자들이 투표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 했다고 추측한다.

      

    [5]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그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소망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12년 12월에는 그것 말고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었다.

      

    [6]

         우리의 역사전쟁에는 분명한 주체가 있다. 하나는 5·16과 산업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한 채 단단하게 결속해 있다. 거대 재벌, 대기업 경영자와 임원들, 저마다 종편방송을 거느린 거대 신문 사주와 고위간부들, 법원과 검찰과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국가폭력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력기관의 고위인사들, 그 신문과 방송에 출연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 모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새누리당이다

      

    [7]

         다른 하나는 4·19, 5·18과 민주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민주화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좌경용공’, ‘종북좌파’라고 부르는 이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낮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인권과 사회정의, 한반도 평화와 환경보호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노동조합, 협동조합, 언론운동단체를 포함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다

      

    [8]

         대립하는 역사인식의 배후에는 대립하는 이해관계와 경험, 서로 다른 인생관이 놓여 있다. 혼자 산다면 역사논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남과 어울려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평가한다.

      

    [9]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國父를 자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10]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11]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대통령과 정부를 찬양할 자유만 있었을 뿐 비판할 자유는 없었다. 정부의 정책을 추종할 권리는 있었지만 반대하거나 다른 대안을 제시할 권리는 없었다.

      

    [12]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산업화시대에 생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심각해져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수렁에 빠졌다

      

    [13]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힘은 국민이 개별적·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며,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욕망이다. 사람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안고 산다

      

    [14]

         만약 모든 욕망을 다 채워서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는다면 더는 행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새로운 욕망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15]

         사람은 물질의 유혹에 끌린다. 헐벗고 배고픈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존심을 굽히면서, 법을 어기거나 남을 해치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한다. 사랑, 존중, 연대, 자아실현과 같은 욕구는 그다음 문제다

      

    [16]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망을 충족하려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만약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에 일정한 순서가 있다면 사람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매슬로는 욕망에 위계位階, hierarchy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의 개별적·집단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17]

         인간의 여러 욕망 사이에 엄격한 위계는 없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해석하면 욕망의 위계 가설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무척 유익하다.

      

    [18]

         왜 모든 신생국에서 대한민국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환경과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국민들은 개별적·집단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신속하게 터득했다.

      

    [19]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물론 그런 헌법을 채택했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나라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 누구나 국가에 대해 자유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20]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고, 헌법은 그저 이념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을 지배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21]

         소비재 경공업으로 출발한 대한민국 경제가 금속,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을 거쳐 전자,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까지 세계 경제의 기술적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데는 지식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22]

         우리는 일제침략기에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을 한 민족이다. 공동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원을 동원하고 의지를 묶어내는 집단적 능력은 경제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회적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23]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24]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25]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26]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면 이런 주장도 그나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27]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원,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28]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할 때는 평화적·합법적으로 정부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국가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29]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 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역사적 대의명분과 경제적 효율성은 당장 어쩌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가진 정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4·19혁명이었다.

      

    [30]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31]

         둘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그는 알고 있는 모든 남로당 인맥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조한 끝에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 유일하게 풀려났다.

      

    [32]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33]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퍼센트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퍼센트 사람들은 늘 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마그나카르타, 권리장전, 미국 헌법,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의 모토는 한갓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34]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35]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있다

      

    [36]

         1978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사우디아라비아 내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일련의 사건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다시 한 번 물가가 폭등했다.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정부가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세율 10퍼센트의 부가가치세를 새로 도입하는 바람에 소비자물가는 더 높게 치솟았다. 민심이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37]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부터 해외자본 차입에 의존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국내자본을 산업화에 동원하기 위한 극비작전을 편 적이 있다. 미국 대사관도 모르게 영국에서 신권을 인쇄해 들여온 다음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선포한 것이다. 1962년 6월 9일 밤 10시의 일이었다

      

    [38]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39]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40]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 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41]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42]

         재벌이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사업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규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강한 시장지배력을 악용해 소비자와 협력업체를 착취하는 행태를 막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매우 어렵다. 국가가 재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국가를 관리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43]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부정부패가 있다.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하는 독재국가일수록 더 심하다.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감시와 견제가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법의 구속을 벗어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의 사유화’ 현상이 생긴다.

      

    [44]

         부당한 권력 행사를 비판하고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그에 적응하거나 편승해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그것이 산업화시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으며 그런 현실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45]

         대한민국 건설사가 중동 국가를 비롯한 외국에서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부정부패였다

      

    [46]

         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도 흐리기 마련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정치권과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언론, 대학, 문화예술계까지도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적 권력을 휘두르는 ‘완장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47]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48]

         정부는 1960년대 이후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출산억제정책을 시행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확대되자 1980년대 중반부터 저출산 현상이 나타났다. 저출산 현상은 노동력 투입 증가를 통한 경제성장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의미했다.

      

    [49]

         IMF가 추구한 목표는 명확했다. 박정희 정부 이래 남아 있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요소를 완전히 없애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이식하는 한편 IMF의 구제금융 자금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에 제공한 대출금과 이자를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

      

    [50]

         어느 특정한 시점에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51]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52]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53]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54]

         한국형 민주화의 경로는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55]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56]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57]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58]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59]

         시위 소식은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관련 학생들이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1단짜리 단신보도가 나오면 국민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60]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61]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62]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63]

         10월 22일 실시한 국민투표에 95.5퍼센트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1.6퍼센트가 찬성했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와 비슷한 결과였다. 국민들이 다시 한 번 폭력의 공포에 굴복한 것이다.

      

    [64]

         1987년에만 1,500개에 육박하는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23만 명이 늘었으며 7월에서 9월까지 3,300건이 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65]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민중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의 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국민이 원하면 평화적·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활용해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거나 완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6]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동시다발적·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67]

         돈이 많고 자손이 귀하면 당연히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수록 사람들은 부, 명예, 지위, 쾌락의 추구를 넘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에 더 끌리게 된다.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이 타인의 존엄성도 존중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다양한 개성을 존중한다. 출산율 저하 현상은 대한민국이 다양성의 광장으로 진화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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