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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7번째 책]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 조국 (★★★★☆)
    1000권 독서 2018. 8. 23. 00:00



    책 속의 한 구절


    내 삶의 두 축은 ‘학문’과 ‘참여’다. 어떤 이는 “세상사에 개입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라고 비난하고, 또 다른 이는 “상아탑을 떠나 대중의 바다에 뛰어들어라!”라고 명령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가려 한다.
      
         공부란 자신을 아는 길이다. 자신의 속을 깊이 들여다보며 자신이 무엇에 들뜨고 무엇에 끌리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아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공부란 이렇게 자신의 꿈과 갈등을 직시하는 주체적인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문이다.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그리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 이 점에서 공부에는 끝이 없다.
      
         나는 지식인이자 법학자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돈과 힘보다 사람이 우선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싶다. 20여 년 전에 감옥에 갇혔던 것도, 지금 적극적으로 정치·사회참여에 나서는 것도, 그리고 연구하고 논문 쓰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에서다.
      
         선행학습은 비용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아이가 학교 수업에 호기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학원에서 미리 배운 학생의 상당수가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 또는 착각하고 수업에 임하니 학교 수업의 성과가 좋을 리 없다. 알렉산더 즈본킨 박사는 『내 아이와 함께한 수학 일기』에서 선행학습은 효과가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기성의 체제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라는 유혹을 던지고 주입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데 길들여지면 죽을 때까지 행복은 유보될 것이다. 오늘 아이의 빛나는 눈동자에 한 번이라도 더 감동하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아닐까.
      
         가치관이 형성되는 나이에 너무 균질화된, 특히 성적우수자로 구성된 집단 속에서 생활하게 되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다. 사람의 다양함과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학생들이 은연중에 ‘성적’이라는 절대 기준으로 사람 보는 법을 배우지 않을까 싶어서다.
      
         학문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계급, 계층, 집단의 경험, 이익, 꿈,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학문이 될 리 없다. 대학이 성적우수자들만의 ‘동종교배’ 집단으로 변질될 때 그 대학 출신이 사회통합을 이루어낼 지도자로 성장할 리 없다.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재미난 것, 즐거운 것, 신기한 것, 의미 있는 것, 영감을 주는 것들이 매우 많다. 이런 것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제대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것을 체험하게 하는 제도와 문화가 너무 취약하다.
      
         학력과 경력을 빼버리면 내게 무엇이 남을까?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가 냉소다. 멀리 떨어져 차갑게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이는 자존감이 약하다는 반증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도 된다’는 것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 속에서 자라난다.
      
         나이가 되어서 돌아보니 확실히 보인다. 젊을 때 가장 필요한 용기는 기성 체제가 “깔아놓은 레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학점이나 어학 실력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수십 번 이상 대기업 서류전형을 통과하지 못하는 젊은이라면, 몇 가지 취업용 스펙을 추가하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퍼붓는 것보다 차라리 한국의 ‘학벌’이 중요하지 않은 해외로 나가 도전해보면 어떨까.
      
         호기심과 노력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두 개의 수레바퀴다. 이 수레바퀴를 온전히 굴리며 목적지까지 가려면 계획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잘 살려면 자신의 능력, 소질, 환경 등에도 잘 맞고, 의미와 재미도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 일을 발견했다면 그 이후의 승부는 일상의 삶에서 결정이 난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분야에서 꾸준히 공부하는 인간으로 살아야 삶에 뿌리내릴 수 있고 더 나아가 행복해질 수 있다. 공부를 즐기는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며, 공부의 성공 조건은 노력이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세상의 불합리함에 맞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는 사명감 또는 부담감을 안고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모이고 모여 쌓이고 쌓여 세상을 바꾸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바로 그 증거다.
      
         창살 안의 감옥에서 꿈꾸는 자유는 아주 소박하다. 백인우월주의 정권에 맞서 무장투쟁까지 전개하다가 초장기수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만델라는 “갇혀 있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다. 자유,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볼 수 있는 것이다”24 하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봤으면 하는 바람이 곧 자유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 사회주의인데, 그 필요성을 무조건 색안경을 쓰고 무시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해결에 필요한 것임에도 냉전의 논리로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사회주의를 비롯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모순을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에른스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의 관점을 빌리면, “사회민주주의의 도래는 ‘입증’되고 말고 할 과학적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윤리적 당위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삶에서 실천으로 ‘구현’해야 할 문제”이다.32 그리고 “잠정적 유토피아”, 즉 “‘현재’로부터 생겨나고 또 ‘현재’에 발 딛고 있는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이를 일상 정치와 결합시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33
      
         오늘날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 아래에 모든 것이 지배되고 있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을 착취하며 살고 있는 사회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비참한 존재가 되고 있다. […] 우리는 새로운 우상들을 창조했다. 고대 황금 송아지에 대한 숭배(출애굽기 32:1~35 참조)가 돈이라는 우상과 인간을 위한 진정한 목적이 결여된 비인격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 잔인한 형태로 변신했다.
      
         “비인격적인 경제 독재”의 정점에는 재벌 일가가 있다. 이들은 최강의 경제권력자들로, 명실상부한 ‘사회귀족’이다. 생래적生來的 비교우위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은 경제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독재가 무너져 정치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경제권력의 독재는 변함이 없다.
      
         다른 말 다 젖혀두고 이 말부터 하고 싶다. 겁내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죽지 마라. 쫄지 마라. 길들여지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그리고 저항하라. 한국 역사를 보라. 한국인들은 굴복하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세계 역사에서 모든 인류는 지배, 억압, 공포에 맞서 싸우고 이기며 여기까지 왔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변화는 내면의 작은 용기에서, 즉 저항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공부를 할수록 그 용기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는 1930년대 초 대공항 시기에 뉴욕 시 치안판사로 재판을 하게 됐다. 그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노인 사건을 맡아 노인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벌금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들은 순순히 벌금을 냈고, 라과디아는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주었으며, 그는 10달러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감동이었다.
      
          약자와 빈자의 기본적 생계를 보장해주지도 못하면서 처벌로만 대응하려는 사회구조에 일침을 놓고,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을 강조한 그의 판결은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았다.
      
         ‘1 더하기 1은 2야’라고 결론을 던져주기보다는 학생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기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수업을 끌고 나갔던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마음먹은 게 ‘보통 노동자들이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을 일하니, 나도 8시간 공부는 꼭 해야겠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을 거듭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공부가 몸에 배게 되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해야 할 목표를 찾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정신없이 공부를 하며 계속 유념했던 문구가 있다. 유학 시절은 물론 지금도 공부하면서 종종 본다. “You are only as good as your last paper.” 즉, “자네는 지난번 발표한 논문의 수준만큼만 좋은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긴장하라는 뜻으로 지금도 연구실 출입문에 붙여놓고 수시로 본다
      
         학문을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공부에서 이른바 ‘위아래’는 없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권위 있는 대가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 그른 것을 가릴 때조차도 나이나 서열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시쳇말로 ‘족보 따지기’와 ‘민증 까기’다. 나이가 몇 살인지, 고향이 어딘지,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몇 학번인지, 심지어 내 친구 누구를 아는지를 따지며 줄을 맞춰보고 적절한 거리를 계산한다. 서열이 정해지고 자리를 앉더라도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미리 알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행태를 ‘예의’라는 포장으로 덧씌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도전과 창조를 죽인다.
      
         법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법은 대개 특정 사회의 계급·계층·집단의 이익과 욕망, 그리고 꿈이 충돌하고 절충되어 만들어진다. 여기서 ‘강자’ 또는 ‘가진 자’가 유리한 조건에 서게 됨은 분명하다. 그래서 법학을 제대로 하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필요하다. 각 계급·계층·집단의 요구와 주장과 논변이 무엇인지 꿰뚫어야 한다. 법전을 넘어 현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특히 ‘약자’나 ‘갖지 못한 자’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일을 막아야 한다.
      
         법학은 정치가 다 반영해내지 못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도 법률에 온전히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법률은 ‘다수파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소수파’는 직간접적인 억압과 차별에 따라 정치·사회적 게토ghetto, 격리 지역 안에 갇히고 만다.
     
      
         법은 존경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법이 권력의 남용과 재벌의 탐욕을 규제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법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며 법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기 마련이다
      
         2005년 내가 발간한 책의 제목인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처럼, 이제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다. 즉, 위법한 신문, 압수, 수색, 검증, 도청 등으로 확보한 증거는 법정에서 힘을 잃는다. 이러한 변화는 놀라운 성취였다.
      
         지배계급의 의사와 이익만이 일방적으로 법에 관철되는 시대나 체제와 달리, 시민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현대 국가에서는 각 계급, 계층, 집단의 의사와 이익이 법에 반영된다.
      
         지난 겨울 생활고에 시달리던 60대 어머니와 30대 두 딸이 반지하 방에서 동반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타살’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간 도덕적이고 준법적 인간이었던 이들의 소망과 바람은 우리의 법에 얼마나 반영되어 있을까.
      
         형사법은 어떤 행위가 범죄인지, 어떤 행위는 범죄가 아니어야 하는지, 범죄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재가 가해져야 하는지, 그리고 피의자와 피고인을 수사, 기소, 재판할 때는 어떠한 절차를 지켜야 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은 재주와 열정을 분출할 곳을 못 찾고 있다. 사회는 이들을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취직에만 연연하게 만들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국가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세상. 그것은 ‘세상을 얼마나 성실히, 열심히 사느냐’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이 경험은 어른이 된 후 진보적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밑거름이 됐던 것 같다.
      
         변화를 일으키는 결정적 순간은 이성으로는 억지할 수 없는 강한 감성의 힘이 자신을 지배할 때다.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그 무엇, 배꼽 아래에서 치솟아 오르는 그 무엇이 있어야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런 감정적 떨림 없이는 잘못을 인지하고도 행동하지 못한다. 지식 습득을 통해 머리로 깨닫는 것, 가능하다. 그로 인한 변화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지식이 가슴 떨림과 만나야 ‘또 하나의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몸은 필연적으로 늙어간다. 체력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달라진다. 세상의 변화가 아득해 보이거나 싫어지고, 변화를 위한 외침과 행동도 과격하거나 미숙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최고라 생각하며 타인, 특히 젊은이의 고민과 상황을 외면하며 ‘어른으로서의’ 훈계를 일삼는다. 경청하고 소통하기보다는 호통치거나 잔소리한다. 젊은 시절 세상의 변화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뛰었더라도 이제는 지나버린 추억담이나 영웅담으로만 간직하고, 역동하는 현실 앞에서는 “나도 다 해봤어. 세상은 쉬운 게 아냐”라고 말하며 주저앉는다. 게다가 다른 사람까지 주저앉히기도 한다.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가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영국이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단지 국민소득이 높기만 해서일까.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이며, 따라서 노동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대다수 시민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이 하위 법률인 형법과 민법으로 인해 껍데기로 전락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시민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정치적 민주화는 상당 수준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정작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사회적·경제적 기본권은 아직도 취약하다. 이 문제가 빨리 중요한 사회의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노동자를 ‘임금노예’로 만드는 법제는 바꾸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친노동’ 사회는 못되더라도 ‘살殺노동’ 사회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은 전진후퇴, 좌충우돌, 우여곡절을 겪으며 천천히 달라진다. 조급하게 마음먹거나 행동하지 말고 이 과정을 다 버텨내야 한다. 세상이 지금보다 빨리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냉소하고 체념하면 안 된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두려움과 용기에 대해 “마음속의 용기야말로 비록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아도 점점 성장해서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이다”라며 의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용기라도 커다란 나무가 될 날을 상상하자.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을 극복해나가자”라고 토닥인다.6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앞으로도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 소임을 계속할 것이다. 주장하고 비판하고 설득하고 호소할 것이다. 또다시 온갖 허위중상과 음해를 받겠지만 감당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질 때까지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어떨 때는 맹렬히, 어떨 때는 담담히. 어떨 때는 웅변으로, 어떨 때는 침묵으로.
      
         지식인은 자신과 이념이나 지향이 같은 사람이나 정당과 함께 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직시하고 지적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진영’ 내부의 문제점도 주저하지 않고 지적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이자 역할이다.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정치에 함몰되어선 안 된다. 이 점에서 지식인은 의도적 고립을 추구하며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해야 한다. 모두가 “Yes”라고 외칠 때, 혼자서라도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공부는 이런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무래도 나만을 위해 하는 공부는 별로 매력이 없다. 우리를 위한 것이기에 나는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즐겁다.

      힘들 때도 많다. 그럴 때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으며 용기를 내야 한다. 나는 언제나 내 공부가 책상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돈 냄새보다는 사람 냄새가 더 많이 나도록 하는 것이 내 공부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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