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읽게 된 이유는 저자인 '진중권' 이라는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였다. 진보정당의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처음 저자를 알게 되었고 TV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는 모습들을 봤었다. 하지만 팟캐스트나 방송의 경우 단편적인 내용에 대한 견해를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진중권 작가의 진면목을 알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전자도서관 목록에 진중권 작가의 책을 발견하고 냉큼 대출을 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굉장히 다양한 주제의 사설을 책 한권으로 편집하였는데 작가의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읽을 수 있어서인지 진중권 이라는 사람의 뇌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특정 토픽에 대해 일방적이고 억지스런 편향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나름대로 자기의 소신과 가치관에 따라 견해를 펼쳐가는 생각과 문장의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예술 정치 문화 역사 고전을 넘나드는 불꽃놀이 같은 문장들이 감탄을 자아내곤 한다.
한가지 아쉬운점을 꼽으라면,,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철학에 관련한 흐름들을 따라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 지면의 절반이상의 내용을 모르거나 10개이상 단어를 모르면 넘어가는 편인데.. 뒤편은 많이 어렵다.
아래는 읽으면서 메모했던 내용들이다.
보헤미안, 이 '창조적 개새끼'의 존재미학이 엘리트주의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 빈곤을 실천한 보헤미안의 라이프스타일은 자본주의라는 욕망기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어가는 오늘날의 대중에게 또 다른 삶의 영감을 줄 수 있다.
오늘날 원본만으로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원본은 매체를 통해 복제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미디어 이론에 '재매개'라는 개념이 있따. 한 미디어가 달느 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령 뉴 미디어는 처음에 올드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모방을 벗어나 자기 고유의 전략을 갖게 된다. 그때쯤이면 거꾸로 올드미디어가 외려 뉴미디어의 전략을 차용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오늘날의 대중은 외려 매체에 정보를 제공하는 송신자로 변했다. 매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오늘날, 기사는 그 자체만으로 기사가 될 수 없다. 대중들의 링크를 걸어 리트윗을 해줘야 비로소 기사는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들어 사는 세계가 실은 미디어가 만든 가상에 불과하다' 이 유명한 명제는 흔히 보드리야르의 것으로 여겨진다.
미디어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미디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실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맛집은 사실이고 이 사실이 허구라는 것도 사실이고, 이 사실 역시 다시 허구라는 것도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논증을 거칠게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이다.
내 머리속에는 '신'의 개념이 들어 있다. 하지만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에서 나올 수는 없기에, '신'은 내가 만든 개념일 리 없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그런데 신의 개념에는 선함이 포함되어 있다. 선하신 그분의 세계의 존재에 대해 나를 기만하겠는가? 고로 세계는 존재한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방법적으로 의밋ㅁ한 모든 것을 다시 긍정한다. 물론 회의를 한번 거친 이 지식들은 이제 기하학적 명제만큼 '확실한' 진리의 자격을 획득한다.
의심할 수 있으려면 일단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아직도 어떤 사회에서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 거기서 사유나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집단은 개인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그 의심을 처벌한다. (중략) 즉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 의심 없이 믿어야 할 사실들이 대부분 '기초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곤 한다. 거기에 의심을 표했다가는 소통의 장에서 당장 퇴장당한다.
그런 사회의 사람들은 자기 견해가 주변과 다른 것을 너무나 괴로워한다. 그 고통, 그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그들은 제 머리를 비우고 그 빈자리에 남의 생각들, 즉 주위에 떠도는 통념을 채워넣는다.
신자들은 불신자를 위해서 말한 순환의 고리 속에 집어넣을 최초의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일단 믿으면 나중에 저절로 그 증거를 보게 될 것'이라 말할 뿐이다. 이른바 '전도'라는 것의 본질은 불신자를 이 증거 없는 믿음의 상태로 집어넣는 데에 있다.
그 사람들의 눈에 나는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자', '자기도 한때는 그랬던 자', 더 나아가서는 '그분을 모르기에 불쌍한 영혼'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중과 소통하려면 밖에서는 자신의 '공리'를 '명제'의 지위로 내려놓고, 믿음(이념)과 이성(논리) 사이의 최적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보수주의가 주장하는 세가지 수사학은 다음과 같다.
1) 사회를 개선하려는 시도는 외려 반대의 결과를 내게 된다.
2) 그래봤자 기존 체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3) 그렇게 하면 자유와 민주가 위험해질 것이다.
보수주의 수사학은 근대 시민혁명과 노동운동의 성취를 무력화하려 한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소비자는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즉 상품 자체가 아니라 상품과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는 얘기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디자인, 이미지, 브랜드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