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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5번째 책] 생각 버리기 연습 (★★★★☆)
    1000권 독서 2018. 7. 28. 09:43



    책 속의 한 구절


    다른 그 무엇보다도   집중을 분산시키는 행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는’ 일이다. 우리의 의식이 언어를 이용해 중얼중얼 계속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이   작업에 사로잡혀 다른 기능들은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항상 눈, 귀, 코, 혀와 같은 신체의 일부분이나 의식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있다. 이런 정보와 자극에 반응하는 마음의   충동 에너지 중에 가장 큰 세 가지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정보에 대해 ‘좀 더, 좀 더’ 하고 갈망하는 마음의 충동 에너지를 탐욕이라 부른다.

      

         이와   반대로, 들어오는 정보에 대해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라고 반발하는 마음의 충동 에너지는 분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원인은,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현실의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눈앞에 일어나는   일은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별 볼일 없게 느끼고, 부정적인 생각이 주는 자극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눈앞의 것에 싫증을 느끼고 다른 자극을 구하려는 마음의 충동 에너지를 어리석음이라 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일만을 생각하는 것, 쓸데없는 사고와 헛된 사고를 버리는 것, 더 나아가 번뇌를   극복하는 것은 불교의 시작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옛날 사람들은 예부터 비오는 소리나 물 떨어지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흥미를 느끼며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 그곳에 있는   것에서 감각적으로 멋을 느낄 줄 알았던 것이다

      

         제안하고 싶은 방법 중 하나는 이야기할 때 항상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렴풋이 들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한창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는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또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하는지, 그것을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등을 신경쓰느라 자신의 목소리는 흘려듣고 만다. 이런 생각에서 떨어져 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어 들어 보면, 색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천천히 얘기해야지’라든가, ‘부드럽게 얘기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닦달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목소리에   의식을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만(慢)’이라는 번뇌의   스위치가 켜지고, 온갖 생각이 들끓기 시작한다. 만이란, 자신이 좋게 평가받고 싶다고 걱정하며 조바심 내는, 프라이드에 집착하는 탐욕이란 번뇌   중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구도 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은 자신의 주가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는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품을 때 보이는 행동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불평을 하며 분노를 발산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외면하고 참으며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권하는 대처 방법은, 억압과 발산이라는 길이 아닌 제3의 길, 즉 ‘응시’이다. 이때 우리가 응시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다.

    만일 화가 치민다고 생각되면, 이 “화가 치민다”를 따옴표로 묶어버린다. 그 다음 ‘나는 “화가 치민다”고 생각한다, 나는 “화가   치민다”고 생각한다…’라고 되풀이 하며 마음속으로 외우다시피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 화가 치민다는 것은 단순한 생각일 뿐이고,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화가 치민다”를 따옴표로 묶어 생각하듯이 어떤 감정 상태든 따옴표로 묶어 ‘~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라고 마음에 되풀이해서 들려준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을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변명이 고질적인 습관이 된 이유는 그것이 주는 괴로운 자극에 마음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괴로운 자극과 불쾌한 자극을 받을 때   두근거리는 느낌을 ‘기분 좋다’로 착각해버리고, 정말 불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쾌락으로 바꾸어 받아들인다. 이처럼 마음은 변명이 주는 단기적인   기분 좋음에 속아 점점 더 많은 변명을 되풀이하며 계속해서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다.

      

         욕을 하면 분노의 독소가 생기고 분노의 번뇌 에너지도 증가한다. 욕은 강한 자극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것을 입에 담는 순간 자신의   마음에도 영향을 끼쳐 마음을 더럽힌다. 욕을 하면 왠지 자신이 상대보다 더 낫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늘어나는 것은 분노의   번뇌일 뿐이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변명이나 거짓으로 꾸며낸 사과와 마찬가지로, 겉치레뿐인 감사의 말을 연발하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을 빌려 감사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상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분명하게 전달하려면 그냥 ‘감사하다’라고만 하지 말고, 다양한 다른 표현들을   사용해 변화를 주면 효과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하는 방법이 아니다. 나는 좌선이나   명상을 가르칠 때에도 호흡법을 다루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한 곳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다.

      

        

    일상생활 중에서 지금 자신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를 호흡을 통해 확인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면, 차츰차츰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가 쉬워진다.

      

         불교 본래의 명상법은 명상할 때의 집중력을 이용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소리가 들릴 때 ‘소리가 난다   → 무슨 소리일까 → ○○ 소리다 → 시끄럽네’라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도,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고 소리 자체를 듣기 위해 집중해야   하고, 이런 집중을 위해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즉, ‘소리가 난다 → …’에서 마음의 반사반응을 멈추게 하는 훈련이다.

      

         과거에 자주 반복해서 들었던 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들었을 때에는 생각을 강요하는 것 같아 반발이   생기다가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듣다 보면 왠지 처음부터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강요당한 말’이 ‘스스로   하는 말’로 바뀌는 셈이다.

      

         자극이 약한 소리는 집중할 수가 없다.

      

         평소에도 소리가 강한 자극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도록 늘 마음가짐을 돌아보아야 한다. 탐욕도 분노도 자극하지 않는 중립적인 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귀 기울여 보자

      

         소리가 지루하다고 느꼈다는 것은, 자신의 의식이 무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라도 자세히 관찰하면 항상 변하고 있다.

      

         만약 그 전까지 주위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사소한 소리도 흥미롭게 듣는 자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일부러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척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리라는 관점에서 귀를 기울이면, 상당히 흥미 깊은 변화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의   목소리 톤이 높아져 차분하게 가라앉지 못한다거나, 차츰차츰 낮고 온화한 목소리로 변한다거나, 쉼 없이 지껄여대며 말이 빨라지거나, 천천히 말을   끊어서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상대가 자신을 희생양 삼아 쾌락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의 말소리라는 정보에 의식을 집중시키면, 상대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이 고통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망상을 멈추고 자비심에 가까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상대방을 움직이는 동기가 ‘고통=스트레스’는 아닌지 살펴보는 것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비판하는 사람은 대부분   상대를 비난하거나 얕봄으로써 해소하고 싶은 스트레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을 멈추고 차분하게 그 목소리를 관찰하는 것으로,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상대가 나쁜 말을 입에 담을 때에도   현실의 정보를 명석하게 분석하면, 그 사람이 자신의 번뇌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고통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오히려 이쪽에서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소리에 즉시 반응하는 패턴에서 빠져나오게 되면, 들려오는 정보가 무엇이든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아’라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칭찬을 들으면 들뜨게 되고, 비난을 들으면 낙심하게 되는 패턴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돌보는 것이다. 늘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지고 있으면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들어도 빨리 대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싫어’라든가 ‘이렇게 되면 좋아’라고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다음엔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고 그의 이야기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감정에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리를 듣고 탐욕과 욕망과 분노의 에너지를 만드는 사람은

    스스로 깨닫고 조절하는 힘을 잃고

    마음이 이야기에 홀려, 그것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는 소리가 만드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인 이야기가 늘어나고,

    또 그의 마음은 욕망과 분노 때문에 상처받는다.

    이처럼 상처를 쌓아가는 사람은

    마음의 평안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중략)

    생각 센서를 통해 깨달으며 소리를 듣게 되면,

    소리를 듣고 탐욕을 부리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 소리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하지도 않는다.

    이런 식으로 소리를 듣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상처를 받지도 상처가 쌓이지도 않는다.”

    - 마리래불경 摩梨來佛經

      

         큰 자극을 주는 것은 즐겨보지 않는 게 좋다. 자극적인 영상에만 익숙해져 버리면, 처음 만난 사람의 얼굴 등 자극이 많은 것에는 집중할 수   있어도, 자연의 풍경이나 늘 만나는 사람의 얼굴 표정과 같은 담담한 자극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자아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은 보지 않는 게 좋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수첩의 전화번호부, 연봉이 드러나는 월급명세서,   저축액이 한눈에 보이는 통장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런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난 이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는 자극이   생긴다. 이런 자극은 단기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지게 하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거나 인정받아야 한다는 만이라는 욕망이 생겨 장기적으로는   자신에게 해롭다. 한편, ‘내 가치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경우에는 마음 속에 분노가 쌓이게 된다.

      

         마음은 어떤 자극이라도 받아들여 단기적인 쾌락을 즐기려 한다. 그래서 ‘이 자극을 받고 싶다, 자극적인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는   생각 앞에 무릎 꿇으며 상황 판단을 잘못하기가 쉽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는 독이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아 혹은 자존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은 최소한 적게 보는 습관을 길러, 그런 것들을 자꾸 보고 싶은 충동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몸짓이 산만해지거나 필요 이상으로 긴장해   딱딱하게 굳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가 지루해서 고통스럽거나 기분 나쁘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상대를 잘 관찰해 보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고통이 보인다.

      

         상대를 관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나부터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도 항상 자기에 대한 평가에만 신경 쓰는 만이라는 번뇌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자체가 하나의 장면으로 누군가의 눈에   비추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고, 상대에게 미묘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 중 하나이다.

      

         웃는 얼굴은 종종 무언가를 속이거나 대충 얼버무릴 때 이용된다. 일이 잘 돌아가지 않거나   곤란에 처할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웃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표정을 의식하려고 노력하면, 얼굴이 이상하게 경직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지금   고통이라는 자극이 조정하는 억지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경직된 딱딱한 미소를 재빨리 거둬들일 수 있다.

      

        

    진심으로 즐겁게, 그리고 온화하게 웃는 것은 좋다. 하지만 비웃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공격해 분노를 웃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누군가를 비웃고   있는 사람을 잘 관찰해 보면, 얼굴이 굳어 있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높거나 괴상하다

      

         최근에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구가 돈을 버는 것과 크게 연결되는 듯하다. 휴대전화와 전자 메일도 그렇고, 인터넷상의 블로그와 커뮤니티 활동도   인기를 끌고 있다.

      

         자신의 일기를 공개해놓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 혹은 ‘내 일을 알리고 싶다’라는 욕구가 생기면, 그 욕구가 충족될 때까지 괴로움이   따라다닌다. 그러다가 자신이 올린 글에 댓글이 다섯 건이나 붙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로 인한   괴로움이 일순간 사라져 얻게 된 쾌락 때문이다

      

         SNS 기능을 가진 블로그나 미니홈페이지를 움직이는 욕구는 현실 속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기초로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만과   관련 있다.

      

         사람들이 익명 게시판에 함부로 글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들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큰 이유는, 그런 글을   쓰는 형편없는 인간이 자기가 아니라고 쉽게 부정해버리기 때문이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이런 부정은 자기를 속이는 행위이며, 자신의 악행에   브레이크를 걸 줄 모르는 무참이란 번뇌이다

      

         쾌락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뇌가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그만큼 즐거움이 늘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에 따르면, 한 번 쾌락을 맛본 뒤에는 ‘좀 더 좀 더’ 하고 보다 큰 즐거움을   찾으며, 그 재료가 되는 괴로움을 더욱 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에 대해 누군가 동의해 주면, 이때에도 만의 욕망이 생겨 자아가 자극되고   중독된다

      

         이상하게도 우리 뇌는 무언가를 하면 안 된다고 자꾸 생각할수록, 그 일에 더 집착하고 더 큰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우리   마음에 격렬하게 스며든다. 따라서 어느 순간 고삐가 느슨해지면,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집착하고 있던 먹는 것에 대한 폭발적인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어진다. 결국 부정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뇌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더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맛이 난다’고 할 때 실제의 맛과 식감의 100분의 1도 채 느끼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음식을 잘 씹어서 확실히 느끼며 먹으면, 공복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양만 먹어도 충분히 먹었다는 실감이   난다. 즉, 만족을 알게 되면 자신에게 알맞은 양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먹는 양도 줄어 살이 빠지게 된다. 이렇게 하면   무리하게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부담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물건을 수집하고 돈을 모으는 데 열중하는 것일까? 일단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보다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면 마음도 편해진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것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부족한 느낌이 들어 괴롭다는 의미이다. 이런 괴로움은 왠지 불행하고   무언가 모자란 듯한 느낌을 주어 ‘그것을 꼭 가져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커지면, 사람을 대할 때에도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만의 욕망으로 변해서 나타난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나를 이렇게 대해 달라, 나를 대할 땐 이러이러한 태도를 갖추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분별하게 소유하는 물질을 늘려 가면, 반드시 인격도 나빠진다. 결국 자신의 가치를 늘려 안정시키기 위해서 소유하는   물질을 늘리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인격이 점점 불안정 상태가 된다.

      

         마음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명철하게 유지하도록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아, 내가 변하고 있구나!’를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지표가 있다. 그 지표란 마음속에서, 물건을 가지고 싶다, 잃어버릴까봐 두렵다는 안개가 걷히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건이   없어지거나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아도 마음에 별다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건에 대한 집착이라는 안개가 걷혀 마음이 한결 맑아진 기분이   든다.

      

         자선사업을 하거나 기부를 하면 ‘난 이 세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감사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자아를 강하게   자극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으면, ‘내 주가가 올랐다!’라고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며 교만해지기 쉽다. 이런   현상은 자기 평가의 내부 거래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쓰는 위대한 나,’ ‘돈을 받지 않고도 일을 해주는 나’라는   만의 번뇌로 인해, 돈을 받지 않는 대신 높은 자기 평가를 받아들이게 된다.

      

         조악한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어 많이 팔아치우려는 사람보다도, 정말 좋은   제품을 정중하게 마음을 담아 만드는 사람에게 돈이 가도록 해서, 결국 그런 사람들이 장사가 잘 되도록 해야 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물건을   사는 것에는 투자라는 측면도 있다. 정말 좋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 돈이 가게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쇼핑을 하면 돈을 제대로 쓰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 것이다.

      

         빈 시간을 통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연습을 해 보자.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명상이다.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면 되는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편안해진다. 오랫동안 집중해서 명상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자비에 대한 생각을 되풀이하며 집중해   보자.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과 지면을 딛고 있는 발을 통해 촉감을 느낀다. 보통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으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럴 때쯤 의자 바닥과 접하고 있는 엉덩이 감각, 등에서 배에 이르는 감각, 신체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감각 등에   지긋이 의식을 집중해 본다. 의식이 그런 촉감을 향하도록 하면 떨어진 집중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조용히 있어 주는 것이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좋다.   이때 “자아, 이야기를 들어볼까?” 하고 생색을 내듯이 하지 말고, 상대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별 다른   말없이 상대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면, 슬슬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지금 무엇 때문에 곤란하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가 확실해질 때까지 쭉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가 단순한 푸념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상대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 설명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질문을 해 보도록 권한다. 상대가 자기 인지를 보다 객관화하기   쉽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상대는 스스로의 모순을 알아차리고 수정하게 되고, 본인 내면에 있는 행복 이미지도   변하게 된다. 그리고 대화를 마치면서 얻은 결론을 자신이 끌어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조금이라도 부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든 그 내면 속에 상대를 이기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는 충동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지칠 대로 지친 상대를 발견하면, 상대의   이야기는 대충 듣는 시늉만 하고 생각의 잡음에 휘둘려 자기 의견을 마구 쏟아 놓게 된다. 문제는 이런 일이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 의견은 옳고 틀리지 않다고 믿으며, 상대의 의견을 보충하고 싶어하는 ‘견(見)’의 욕망에 지배당하기 쉽다. 상대에게 의견을   인정받으면 견이 자극되기 때문에, 곧 자기 의견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어진다. 평소에는 상대의 반발이 두려워 이 견의 욕망을 억누르고 지내지만,   곤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이것은 상대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오해하며 반응해버린다. 자기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자기 의견을 마구   주장하기 시작하는데, 브레이크도 잘 듣지 않는다.

      

         만일 상대에게 충고하고 싶어지면, 냉정하게 ‘지금 나는 상대에게 내 의견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닐까?’ ‘견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 배경에 있는 진심을 헤아려 봐야 한다

      

         누군가를 불쌍한 듯이 동정할 때, 그것은 대부분 우월감에서 나오는 감정이기 쉽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자신의 모습에 흥분해, ‘다른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젖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때문에 흥분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동하기 때문에   실제로 상대의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번뇌 때문에 과잉 반응해 상대의 지나친 응석이나 푸념도 받아주고 만다. 그 결과   본인은 자기가 지금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상대를 망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걱정이란 자기 맘대로 즐기는 취미활동 같다. 진정 상대를 위한다기보다는 자기가 걱정하고 싶으니까 걱정하는 것이다.   보통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 걱정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불안과 동요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불쌍한   것은 이 사람이지, 내가 아니다, 큰일 난 사람도 이 사람이지 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걱정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상대가 평안해질 수 있는   방법만 찾게 된다. 이렇게 되려면,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친절해 보이려는 자기를 버리고 담담한 자비심을 길러야 한다. 위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자신을 괴롭힐 일도 상대를 괴롭힐 일도 사라진다. 그러면 번뇌의 실에 매달려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마음을 더럽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말을 멈추어야 한다. 마음을 더럽히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생각을 차단해야 한다. 마음을 더럽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행동을 그만두어야 한다.

      

         특히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4시간은 생체리듬상 휴식과 회복에 가장 중요한 시간대이므로, 최소한 날짜가 바뀌기 전에는 자야 한다. 그러면 아침에 일찍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고, 쓸데없는 생각의 잡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식 생활의 가장 큰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침묵이라고 해서 무조건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마음속에서 생각의 잡음이 끓어오르지 않게 하자는   거지요. 즉, 생각의 잡음을 침묵시키자는 것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드는 이야기 방법도 피해야 하구요. 이야기할 땐 당장 기분 좋게   느껴져도 몸이 고통스러워하는 잡음을 만들어내는 언어 사용법도 멀리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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