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한 구절
글을 쓰면서 여자, 엄마, 노동자라는 집합명사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김지영이라는 고유명사로서의 삶을 지켜내고자 버둥거렸다. 네모난 수영장에서 눈부신 바다로 나아간 이십 대, 나에게 글쓰기는 곧 안간힘 쓰기였다.
다른 강좌가 잘 살기 위한 방향과 목표를 이미 결정한 이들에게 글쓰기의 실용적인 기법을 전수하는 방식이라면, <글쓰기의 최전선>은 왜 그 직업을 욕망하는지, 밤이고 낮이고 쓰는 글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잘 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등등 자기 생각과 욕망을 글로 풀어내며 나를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증언이다. 누군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여지없이 맞닥뜨리는 문제들, 고민들, 실험들, 깨침들, 변화들, 질문들에 관한 이야기다. 글을 쓰고 싶은데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할 때, ‘왜’라고 묻고 ‘느낌’으로 써내려가는 그 섬세한 몸부림의 시간을 담았다. 지난 4년 간 글쓰기 수업의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구성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사고를 해석하는 데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 ‘전문가에게 맡기기’와 ‘단순화하기’라고 한다. 이는 꼭 전쟁이나 종교 대립, 금융위기 같은 거대 담론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층위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자기 이해를 전문가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풀어가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중 가장 손쉬운 하나가 내 생각에는 글쓰기다.
쓰는 일이 작가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길 바란다.
‘여럿이 함께’ 쓰기 위해 모였다는 점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한국 사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낯선 사람들과 무작위로 섞이는 기회가 극히 적다. 비슷한 가방을 들고 비슷한 메뉴를 고르며 비슷한 드라마를 보는 사람끼리 어울린다. 그런데 동류 집단을 벗어나 낯선 배치에 놓이는 기회가 글쓰기 수업에서 주어진다. 저마다 다른 삶의 이력을 갖고 있으며 고단한 삶에 쉼표를 찍고자 떠나온 사람들과 마주하는 시간. 젊은 농부와 프로그래머가 만나고 공무원과 예술가가 벗한다. 다른 감각 다른 경험 다른 문화를 접한다. 이런 외부 자극과 내적 감응은 우리의 세포를 글 쓰는 신체로 활성화시켜준다.
열 편 남짓 글을 쓰고 나서 예외 없이 글감의 고갈에 직면하는 이유는 삶 혹은 나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어쩌면 글감의 빈곤은 존재의 빈곤이고, 존재의 빈곤은 존재의 외면일지 모른다.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수년간 한 편도 안 쓰는 사람은 주변에서 종종 본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즐기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나는 글이 쓰고 싶다는 이에게도 슬쩍 권한다. 하루는 책을 읽고 하루는 글을 쓰며 한 달을 해보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지켜보라고.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볼 수 있다. 글쓰기 초기 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보여)도 지금 자기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쓰면서 실망하고 그래도 다시 쓰는 그 부단한 과정은 사는 것과 꼭 닮았다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과도한 주인공 의식’을 글쓰기에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 문제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색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 자신의 현안에 가려 남의 일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을 쓰기 어렵다. 대개는 자기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 남을 대한다. 만약 누군가 자기 과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유사한 삶의 경험치를 가진 타인을 동정과 수치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의 편견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억눌린 욕망, 피폐한 일상 같은 고통의 서사를 길어 올리는 학인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 결국 같은 이야기다.
자꾸 도망가고 싶고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서 그래도 과제를 내려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하얀 화면을 글로 메우다 보면 ‘응시’의 힘이 생긴다. 그리고 똑바로 볼 수 있다는 건 더는 두렵지 않다는 뜻이다. 나를 따라오는 게 귀신인지 사람인지 승냥이인지 형체가 모호할 때 훨씬 두렵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내 글의 첫 독자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과정은 곧 부단히 읽는 일이다. 한 문장 쓰고 읽고 한 문단 쓰고 읽고 한 장 쓰고 읽는다. 쓰기는 ‘읽으면서 쓰기’에 다름 아니다. 좋은 글에 대한 감각을 길러놓아야 내 글의 어디가 문제인지 짚어내고 고쳐 쓰면서 더 나은 글을 지향할 수 있다.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한 사람이 그간 읽은 책, 들은 말, 본 것, 접한 역사와 당대 이념 등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그것이 풍부할수록 더 힘 있고 좋은 글이 나온다. 내가 글쓰기 수업에 책을 넣는 이유다.
카프카의 말.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나는 학인들에게 책을 읽되 ‘진실한 독해’를 당부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사실에 부합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곧 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저자의 의도에 맞추려 낑낑대지 말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다. 지식 따로 생활 따로의 교육 풍토 탓일 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한된 삶의 조건에서 한정된 독서를 한다. 만나는 사람을 계속 만나듯이 읽던 책들을 주로 읽는다. 그간 읽어왔던 이물감 없이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책들 위주로 본다. 그것이 참다운 독서일까. 앞서 카프카가 말한 내면의 얼음 바다를 더 단단히 만드는 책 읽기. 자아가 유연해지기보다 고집스러워질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그건 약일까 독일까.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문태준의 『가재미』, 최승자의 『이 時代의 사랑』,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 조용미의 『기억의 행성』
학교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 쓸모를 세뇌당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의 척도는 물론 화폐다. 내 앎이, 내 삶이 교환가치가 있는가. 잉여가치를 낳는가. 제도교육은 남보다 교환가치가 있는 인간, 곧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육 과정이다.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맞춰지면서 본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는 상태로 일상이 굴러간다. 그런데 유용하지 않아서 억압하지도 않는 시. 이 시대에 쓸모없다고 취급받는 시. 언어들의 낯선 조합으로 정신을 교란시키는 시. 가장 간소한 물성을 가진 시를 통과하며 학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자각한다.
니체는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없다며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사적 독서가 아무래도 아는 지식을 재차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공고히 할 위험이 있다면, 함께 읽기는 이를 피해갈 기회가 주어진다.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 (학자의) 권위에 복종하지 말고 (나만의) 느낌에 집중하기. 시의 본령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결을 무한히 펼치는 데 있다. 시가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 읽을 때는 참고도서를 들춰보지 말자고 당부했다.
글쓰기 비법으로 흔히 삼다(三多) 원칙을 말한다. 다독, 다작, 다상량(多商量).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이 세 가지 과정의 앙상블이 ‘합평’이다. 책 보고 글 써서 토론하기. 합평은 글쓰기 수업을 하루로 치면 오후 2시의 태양에 해당한다. 가장 뜨거운 시간이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가 ‘구조주의’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잊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며 공포와 무감각을 쫓아버리고 말을 하게 하고 탄식하게 하며 행위를 하도록 자극한다. 동정에는 무언가 고양하고 우월감을 주는 점이 있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동정의 수혜자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동정하는 자 자신이다.
누구나 자기 렌즈로 세상을 본다. 눈물이라는 렌즈로 보아야 타인의 눈물이 보인다. 내가 외로워야 남의 외로움도 눈에 든다. 언젠가 나는 길 가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남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아 창피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전화를 끊을 수도 없었다. 그 뒤로 길가에서 눈물지으며 통화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기형도의 시구대로 “기억할 만한 지나침”인 것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지나침을 통과하다 보면 정서의 결이 생겨나고 그 결에서 글이 빚어진다.
경험은 다다익선이다. 하지만 세계 일주를 한다고 해서, 더 다양한 종족과 관계하고 더 낯선 이방인과 접속한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깊어지는 건 아니다.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경험한 것을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글이란 또 다른 생각(글)을 불러오는 대화와 소통 수단이어야 한다.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그러니 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깨소금을 치듯 글도 기어코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 하루도 참 알차게 보냈다,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 같은 ‘그림일기형’ 엔딩 처리인데 글이 식상해지는 지름길이다. 기껏 자기 경험과 생각에 근거해 잘 써놓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글이 평범해진다. 그런데 이 교훈적인 마무리도 습관이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보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느낀다. 가장 큰 가난은 관계의 빈곤이다. 관계가 줄어들면 자아도 쪼그라들고 관계가 끊어지면 자아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