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한 구절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에 나는 침묵했다.
어쨌거나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가두었을 때에 나는 침묵했다.
어쨌거나 나는 사회민주주의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잡아갔을 때에 나는 침묵했다.
어쨌거나 나는 노동조합원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에 저항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르틴 니묄러(개신교 신학자, 1892~1984)
법 비판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판사의 판결에 관한 비판, 다른 하나는 판결의 근거가 된 법 자체의 비판이다
사회가 성숙함에 따라 제대로 된 법 비판, 즉 사법의 관점에서 법의 정당성과 판결의 적절성을 따지는 논의는 머잖아 매체는 물론이고 대중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담론의 영역으로 떠오를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공공성의 이름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면 공공성 강화를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고 설득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공공성을 해체하려는 강자들의 노력에 대한 약자들의 감시와 견제도 어려워진다.
변화의 목소리는 그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보기에는 필연적으로 편향적이며 ‘불공정’하다
표현은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 불쾌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인권침해의 주체인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진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양극화를 심화시킨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신뢰 자체를 땅에 떨어뜨려 다음 정부에 누가 들어와도 공공성 확대를 허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소통은 정신적인 상호작용일 뿐 타인에게 강제력이나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결국 표현의 자유는 인간성의 보호와 불가분의 관계며, 신자유주의 반대의 목표다.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은 인간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평등을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위한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모두의 자유를 죽인다.
허위사실이 타인에게 초래하는 피해나 그 유포자가 취하는 부당이득 등에 대한 처벌이지, 허위주장 그 자체에 대한 처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거나 금품을 갈취당한다거나 하는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처벌을 허용하는 것이지, 말이 틀렸다고 해서 처벌하는 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바로 허위 그 자체를 처벌하는 법이 있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허위사실유포죄는 위헌일 뿐만 아니라 국제인권기준을 명백히 위반한다. 왜냐하면 포장만 허위사실유포죄일 뿐, 실제로는 정부의 비리에 대한 진실된 고발과 비판을 처벌하는 진실유포죄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허위사실 자체를 처벌하는 국가는 유일하게 우리나라뿐이다.
과학철학은 ‘진실의 조건’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다양한 학파들이 동의하는 부분은 진실과 허위의 차이는 명료하지 않으며 단지 진실을 위한 부단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허위임을 입증하는 작업의 연속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문명은 더 발전할 여지가 없다. 전에는 허위인지 몰랐던 주장이 허위임이 ‘밝혀지면서’ 문명은 발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표현이 허용되는 게 아니라 특별한 표현이 허용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표현은 어차피 규제되지 않는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또는 권력자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표현의 자유다.
우리는 우리가 다수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수가 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실을 올곧게 대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다
장자연이 남긴 유언장과도 같은 문서, 안기부가 본의 아니게 남긴 X파일, 외국 과학자들과 언론이 광우병에 대해서 한 말, 누리꾼들이 황우석의 테라토마 사진을 보고 제기한 의혹들이 바로 그러한 단서들인데, 이를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 그 단서들이 불충분하다고 하여 감옥에 가야 한다면 누가 비리 고발을 하겠는가?
“나는 소수가 아니다.”라는 추정 속에 살려는 욕망이 바로 소수에 대한 차별의 토양이다. 그래서 모든 차별은 원래 자기증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증오 속에서 명예훼손죄, 모욕죄는 태어났다. 이 법들이 모두 사회적 강자들이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 않는 아랫것들을 처벌하기 위해 시작된 법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나라처럼 일반인모욕죄로 확산된 국가는 독일·일본·대만뿐이다. 독일에서 귀족들이 상호 간의 무례함을 두고 결투로 다투던 것을 순치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는데, 일본이 독일의 법제를 수용하고 대만과 우리나라는 식민지시대 때 강제로 착근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욕설을 당한 피해자는 가만히 있어도 검찰이 알아서 욕한 사람들을 기소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이버모욕죄’를 만든다면, 결국 검찰이 눈치를 봐야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자들을 표현의 수위가 좀 높다는 이유로 고소도 하지 않고 형사처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제도가 탄생하게 되는 격인데 봉건적 잔재에 다시 불을 밝히는, 정녕 ‘국가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경멸적인 언사는 없다. 경멸적인 상황이 있을 뿐이다. 미국대법원 판결문의 한 구절처럼, 한 사람의 욕은 다른 사람에게는 노랫말이 될 수 있다. 모욕은 text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context(문맥)에서 발생한다.
평가는 하되 모욕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욕죄의 존재에 대해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면 대체로 이런 반응들이 돌아온다. “그 법은 ‘가진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즉 모욕당할 자존감을 입증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실제 모욕죄 고소인들을 살펴보면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
대부분 나라들의 헌법은 표현의 자유가 일반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행동의 자유’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표현이 해악을 일으킬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 즉 표현이 행위처럼 작동할 경우에만 규제할 수 있다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원리가 지켜진다. 그렇다면 의견과 감정의 표명은 그러한 위험이 없다
정보통신망법 제44조의7은 세계에서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법이다. 이 법은 행정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인터넷에 게시된 표현물들을 광범위한 사유로 삭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른 선진국들에서는 행정기관이 표현물의 내용을 규제하는 것은 ‘검열’로 여겨 금지한다
인터넷실명제하에서는 불법 게시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어차피 의도적으로 불법 게시물을 올릴 사람들은 자신의 실명과 번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불법 게시물을 올리는 자들은 어차피 영향을 받지 않는다. 도리어 이 제도로 인해 합법적인 게시물을 쓰려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줄어들 것이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스스로 불법물 게시를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 때문에 강제로 위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