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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9번째 책] 쓰기의 말들 (★★★★★) - 은유
    1000권 독서 2018. 9. 29. 22:21



    책 속의 한 구절


    독자의 피드백이 거의 없다. 요구되는 수준은 ‘웬만큼’이다. 그래도 내 글을 누군가 한 사람은 반드시 본다는 마음으로 공을 들였고, 그 글을 거짓말처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의 신망을 얻어 글 쓰며 생활하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삶의 구체성을 벗어난 무책임한 비유가 아닌 일상의 구석까지 훑어 내는, 삶의 무자비와 세계의 인식 불가능성을 순순히 인정하는 진짜배기 글을 쓰고 싶었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이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라는 니체의 말은 ‘나는 너무 뒤처진 게 아닐까’ 비관하는 늦깎이 작가에게 자기만의 보폭으로 길을 가도록,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글을 쓰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니체의 문장이라는 연료를 넣은 덕분에 나의 글쓰기는 휘청일지언정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수영 초보자는 물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손발에 힘이 들어가고 가라앉는데 물에 몸을 맡기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 수영을 할 수 있다며, 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힘 빼고 자기 생각을 펜에 맡기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배움의 원리는 비슷하지 않을까. 결심의 산물이 아닌 반복을 통한 신체의 느린 변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펜을 움직여야 생각이 솟아나는 것처럼, 물속에서 팔다리를 부단히 움직이면 나도 수영을 배울 수 있을 텐데, 물에는 가지 않고 이렇게 책상에만 앉아 있다.

      

         나를 본다. 비교적 생활이 안정된 시기의 글쓰기 욕망은 순했다. 영화나 책 읽기 같은 문화 생활 향유의 후기였다. 쓰면 좋지만 안 써도 무방한 글. 향유의 글쓰기. 내가 글을 부렸다. 생활의 기반이 흔들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릴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소멸될 게 분명했다.” 생존의 글쓰기. 글이 나를 쥐었다.

      

         “간절하게 원하면 지금 움직이세요. 노희경입니다. 2005. 6”

      

         아침에 눈 뜨자마자 책상에 앉아 책을 뒤져 자료를 추려 놓는다. 또 버스에서 시집을 보다가 관련한 단어나 괜찮은 표현을 발견하면 메모한다. 틈틈이 생각의 단초를 풀어놓는다. 문장 단위로 사고하고 단락으로 정리하며 매만진다. 마치 나무를 잘라 놓고 대패질을 해 놓듯이 말이다. 그 단락들을 요리조리 배열해 놓고 잠든다. 꿈에서 사유를 불어넣는다.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다시 고친다. 어느새 글 한 편 완성된다. 큰마음 먹기가 아니라 짬짬이 해 나가기의 결과다.

      

         삶은 성적이나 취직 같은 한두 가지 변수로 좋아지거나 나빠질 만큼 단순하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것, 부단한 사건의 이행 과정이지 고정된 문서의 취득 수집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글쓰기가 자기를 겉꾸미고 남의 삶을 끌어다가 왜곡하고 자기 편의대로 가공하는 수단이 되는 게 어쩐지 가슴 아프다. 약한 것, 모자란 것, 초라한 것을 가리고 누르는 수단이 되는 게 너무도 쓸쓸하다. 무시나 과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옹호의 글쓰기는 이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일까. 손해나는 일일까. 어떤 실패나 어떤 상실도 삶으로 통합해 낼 수 없다면 글쓰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삶의 상품화로써의 글쓰기에 떠밀리는 삶의 옹호로써의 글쓰기를 나는 두 손으로 받아 내고 싶다.

      

         『숨그네』를 읽다 보니 조금은 보인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울림이 단문의 허기를 메워 준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문장 사이로 진실의 표정이 날렵하게 드러난다. 견고한 단문의 성채는 행간의 힘이 좌우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덧붙여야 할까 보다. 단문을 쓰세요. 행간을 살리세요.

      

         닫힌 방 안에서는 생각조차 닫힌 것이 된다.

     

      E. H. 카

      

         배산임수한 전원 주택에 사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한 평 고시원에 사는 사람에게 나오는 글이 있다. 같은 여자라도 아이 둘 키우며 일하는 주부인 내가 감각하는 세상과 연구실에서 종일 보내는 교수가 접속하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글도 다르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나 글감이 있다는 것.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뿐이랴. 글쓰기는 만인에게 공평하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읽는 사람 입장이 되면, 끝나지 않는 글이 고역이다. 중언부언 반복되고 추상적이고 장황하고 어수선한 글은 매력 없다. 빤한 얘기로 채워진 글은 지루하다. 정보만 많은 글은 눈이 뻑뻑해진다. 그걸 알기 전까지 연애 초보처럼 굴었다. 이젠 점검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주례사 같은 글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적절한 자리에 마침표가 딱 찍힌 글인지.

      

         ‘내용만 진실하다면 소재는 무엇이라도 좋다.’ 이 대목에서 내 얼굴도 덩달아 환해졌다. 어떤 것이 글감이 되고 어떤 것이 글감이 되지 않는가. 처음엔 선별의 문제로 접근했다. 작가라는 자의식도 없던 때, 글이 쓰고 싶어서 무작정 글을 쓰고는 너무 유치한 거 아닌가 검열하곤 했다. 딸아이가 키우는 새우젓만 한 물고기 구피 이야기, 성남 모란시장 음식점에서 본 취객 이야기 같은 글감이 그랬다. 그 왜소하고 볼품없는 것들이 사유를 자극하고 생각의 갈래를 피워 올렸고 그래서 나는 썼지만, 정치와 사회와 역사의 거대 담론 사이에서 어쩐지 위축되곤 했다. 그런데 그 글을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 연재했을 때 독자들은 내가 본 것, 느낀 것에 조용히 공감해 주었다. 그 일로 용기를 얻었다. 영 아닌 소재는 없구나. 소재 찾기보다 의미 찾기로구나.

      

         진실 되지 못한 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현란한 수사로 치장을 하게 되면, 그것은 고운 헝겊을 누덕누덕 기워 만든 보자기로 오물을 싸 놓은 것처럼 흉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한승원

      

         글쓰기에는 어떤 것도 운 좋게 찾아오지 않는다. 글쓰기는 어떠한 속임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 모든 문장은 기나긴 수련의 결과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사람의 빛깔이 달라지는 시간. 한 사람에게 작가의 소양이 형성될 즈음, 무엇을 읽었느냐보다 어디에 누구와 있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조지 오웰의 불지옥 오 년, 아니 작가 수업 오 년을 상상하니 그렇다.

      

         글에서 첫마디가 길흉을 좌우하는 수가 많다. 너무 덤비지 말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 것이다. 기奇히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면 된다.

     

      이태준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라는 요란한 비유가 있기도 하지만, 나는 점점 그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시작만 요란한 글에 실망하기도 하고, 앞에서 말한 경우처럼 첫 문장이 어렵거나 평이해도 좋은 글을 많이 접하기도 해서 그렇다.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

     

      이태준

      

         ‘말하자면’, ‘그러니까’, ‘모두’, ‘다 함께’, ‘~을 가지고’, ‘~에 관하여’, ‘의’, ‘도’, ‘들’같이 별다른 역할이 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단어, 부사, 조사를 삭제했다. 단체의 설립 목적과 주요 활동은 질의 응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원고량이 삼분의 이로 줄었고 주제가 보였다.

      

         매일 쓰는 글 특유의 맛. 삶을 곱씹어 만든 단맛. 달지 않은 팥이 꽉 찬 단팥빵 같은 글. 그걸 누가 맛있게 먹고 말해 주면 좋겠다. “매일 글 쓰는 사람의 글이네요.”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리베카 솔닛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놓인 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한다.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좋은 글에는 금기와 위반이 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드러내고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밝혀낸다. 작가의 용기에 탄복하고 작가의 용기에 전염된다.

      어쩌면 용기란 몰락할 수 있는 용기다. 어설픈 첫 줄을 쓰는 용기,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 남에게 보여 주는 용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다시 시작하는 용기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나탈리 골드버그

      

         어떤 이들은 평생 배우고 쓴다지만 특정한 서사를 주어진 틀 안에서 되풀이하고, 어떤 이들은 뒤늦게 배우고 쓰면서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된다. 자기가 누구인지 ‘기죽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른에게 글쓰기는 사회적 표정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는 행위였다. 돈과 나를 맞바꾸는 거래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나’를 만나는 일, 자기의 사회적 표정과 대결하며 본래의 표정을 되찾는 일이 어른의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

      

         문체란,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다시 봐도 마음이 간질거린다. 밑줄을 그어 두고 연구했다. 만약 나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썼을까.

      

         슬픈 일은 터놓을 마땅한 장이 없다. 복잡한 서사와 감정이 중첩되어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말하고 나도 영 개운치 않다. 자기 슬픔을 내보이면 약점이 되기도 한다.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 사회에서 슬픔 말하기는 금기다. 슬픔이 노폐물처럼 쌓여 갈 때 인간의 슬픔을 말하는 책은 좋은 자극제다. 슬픔을 ‘말하는 법’을 배우고 슬픔을 ‘말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준다.

      

         공부는 독서의 양 늘리기가 아니라 자기 삶의 맥락 만들기다. 세상과 부딪치면서 마주한 자기 한계들, 남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얻은 생각들, 세상은 어떤 것이고 사람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수정해 가며 다진 인식들. 그러한 자기 삶의 맥락이 있을 때 글쓰기로서의 공부가 는다.

      

         글에서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주제와 관련된 상황’의 구체성이다. ‘어제 카페에서 하루 종일 만화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창이 넓은 2층 카페에서 만화 『레드 로자』를 읽었다’가 좋다. 별거 아닌데 싶은 자잘한 요소 하나하나가 인물의 욕망을 밝히고 주제의 전달을 돕는다.

      

         표현‘력’은 단어와 단어를 연결 짓는 힘이다. 어떻게 소박한 낱말을 잇대어 정확한 감정과 사실을 견인할 것인가.

      

         한 사람이 글 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연습과 노력 외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단지 구직을 넘어 삶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일임을 나는 선배와의 인연에서 실감했다.

      

         글쓰기는 감각의 문제다. 남의 정신에 익숙해질수록 자기 정신은 낯설어 보인다. 들쑥날쑥한 자기 생각을 붙들고 다듬기보다 이미 검증된 남의 생각을 적당히 흉내 내는 글쓰기라면 나는 말리고 싶은 것이다.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무언가를 드러낼 때에만 신뢰할 수 있다.

     

      조지 오웰

      

         내가 좋다고 남에게 권하는 게 얼마나 폭력인지 당해 보니 철렁했다.

      

         인생에서 스친 무수한 인연과 겪은 수많은 사건에 자기 행동의 기원이 있다. 다른 사건과 관계가 투입되는 운동 속에서 한 존재는 변한다. 자기 경험을 기반한 글쓰기는 관계 속에서 나를 관찰하고 변화를 기록하는 일이다. 가족, 친구, 애인, 행인, 스승, 동료 등이 빠지지 않았나 살펴야 한다. 그들이 없으면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삼사십 대 여성 저자군의 면면은 이렇다. 정신과 의사, 아나운서, 변호사, 예술가, 정치인 등 전문 영역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 아니면 요리나 패션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 블로거나 살림왕 주부이거나 아이를 ‘특목고’나 명문대에 진학시킨 교육왕 엄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살림하고 밥벌이하며 자아 찾기 하느라 용쓰는 나같이 평범한 여자의 글은 별로 없다.

      그럼 해 볼까 싶었다. 사회적 성취나 인정 없이 살아가기도 쉽지 않다는 것, 매일매일 시곗바늘처럼 돌아오는 일상을 어떻게 허덕거리며 건너가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고 이왕이면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겁도 없이 첫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고 합목적성을 거부하며 습관을 중단하는 일. 나의 소심한 딴짓은 일상에 잔재미를 안겨 준다. 글쓰기엔 귀한 자극제다. 다른 감각을 쓰게 하고 다른 세상을 보게 하고 다른 얘기를 만들어 낸다. 인생은 미친 짓으로 위대해지고 글쓰기는 꾸준한 딴짓으로 가능해진다고 말해도 좋을까.

      

         글이 꽉 막힐 때는 이유가 있다. 정보와 지식이 얕아서 그렇다기보다 충분히 소화되지 않아서 문제다.

      

         글쓰기가 단번에 완성되는 생산품이 아니라 점점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글을 잘 쓸 수 없다.

     

      윌리엄 진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은’ 것의 차이. 하루 이틀은 쓰나 안 쓰나 똑같지만 한 해 두 해 넘기면 다르다. 다행히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잘 쓰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저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글이 어서 늘기를 재촉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는 동안 안 보이는 성장의 곡선을 통과했다. 어떤 불확실성의 구간을 넘겨야 근육이 생기는 것은 몸이나 글이나 같은 이치였다.

      

         문학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김수영

     

      

         제법 말쑥해진 최종 원고를 보면 가슴이 철렁하다. ‘이만하면’ 됐다며 덮어 두려고 했던 거친 원고가 떠올라서다. ‘이만하면’이라는 말은 위험하다. 됐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대개의 원고는 ‘웬만하면’ 한 번 더 다듬는 게 낫다.

      

         글로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변덕스러움, 나약함, 얄팍함, 불확실성을 어디서 확인할까. 이토록 오락가락하면서 과연 어디로 가는지 궤적을 어떻게 그려 볼까.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상태를 인식하는 것. 글이 주는 선물 같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스티븐 킹

     

      

         글쓰기 초보자에게는 부사가 독이다. 부사가 번성하면 주어와 동사로 이뤄진 주제 문장의 메시지가 묻힌다.

      

         상대방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김대중

      

         세계는 복수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상대방의 ‘말귀’를 알아듣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남도 알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고 착각이다. 전 국민이 독자가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배경 지식을 넣으면 더 많은 독자를 아우를 수 있다.

      

         하루키는 소설 쓰기를 ‘튀김 올리기’에 빗댔다. 자신이 먹고 싶어서 튀긴다는 생각을 하면 어깨에 힘이 쑥 빠지고 그때부터 상상력이 나오기 시작한다며 말했다. “소설을 쓰기 어려우면 튀김을 생각하세요. 술술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와 놓고 막상 글 쓰는 건 회피하는 이들을 볼 때 난처하다. 그 자기모순을 직시하도록 하고 쓰도록 권한다.

      쓰기 전엔 잘 쓸 수도 없지만 자기가 얼마나 못 쓰는 줄도 모른다는 것. 써야 알고 알아야 나아지고 나아지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안심한다. 안 쓰면 불안하고 쓰면 안심하는 사람, 그렇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글을 책으로 엮으며 알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그 자신이 영리한 독자, 냉정한 판관이 되어야 한다. 글이 삐걱거리는 순간을 알아채는 감각이 우선, 더 낫게 고치는 기술은 다음, 갈수록 나아지는 글을 보는 기쁨은 오래 기다려야 주어지는 선물이다. 첫 독자에만 주어지는 아주 귀한.

      

         두 가지 질문을 오가면서 읽는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가’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잘 전달되었는가’.

      

         난 접속사를 빼고 문장을 다시 읽어 보라고 한다. 읽으면 바로 안다. 접속사 없이도 의미가 통한다는 사실을.

      

         타인의 삶으로 연결되거나 확장시키는 메시지가 있는가. 이리저리 재어 본다. 자기 만족이나 과시를 넘어 타인의 생각에 좋은 영향을 준다면 자기 노출은 더 이상 사적이지 않다. 돈 내고 들으려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글쓰기란 생각의 과정을 담는 일이다. 생각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중지하는 것이다. 글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는가. 글 쓰는 사람에겐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지표가 된다

      

         굳어 버린 지각과 감성이 아니라 흔들리는 감정과 울분이 사유를 갱신하는 글을 낳는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글)이 어디 있으랴.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수전 손택

     

      

         왜 글을 쓰는가? 내가 본 진실을 말하고 싶다. 왜 그림을 전시하는가? 힘든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 왜 그래피티를 하는가? 규범과 질서로 꽉 짜여 사람들을 구속하는 사회의 틀을 흔들고 싶다. 그간 내가 만난 예술가들에게 들은 얘기다. 소박하든 거창하든 허황되든 겸손하든, 내면의 동기는 한 사람과 그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창작은 혼자 하는 일, 자문자답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 마지막 시간에 학인들에게 말한다. “작가로서 자의식을 가지세요. 나는 왜 무엇을 쓰고 싶은가,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사람들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 물음을 어루만지는 동안 아마 계속 쓰게 될 거예요.”

      

         필력은 체력이다. 머리가 맑지 않으면 단어 하나 떠오르지 않고 사실 관계 확인도 귀찮아지니까 단단한 글이 나올 수 없다. 감정의 건강도 챙겨야 한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듣는 사람이다. 심사가 복잡하면 왜곡해서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듣는 귀도 건강에서 온다.

      

         책을 내면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한데, 부끄러운 건 책을 낸 사실 자체이고 좋은 건 모르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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