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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0번째 책] 마녀 프레임 (★★★☆☆) - 이택광
    1000권 독서 2018. 10. 2. 22:24



    책 속의 한 구절

    한번 만들어진 프레임은 반복적으로 활용되면서 인식 체계를 구성한다. 단시간에 프레임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프레임이 더욱 체계화되는 것이다. 마녀사냥 과정은 이런 프레임 이론을 통해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신비로운 존재였던 마녀가 졸지에 악마와 놀아나는 원천적인 해악으로 받아들여졌다. 마녀를 새롭게 규정했던 개념과 도덕적 프레임이 작동하면서 벌어진 전무후무한 일들이 내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핵심이다.

    마녀 프레임을 작동시킨 방아쇠가 바로 『마녀의 해머Malleus Maleficarum』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또한 ‘인쇄술의 발명’이 그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마녀 프레임은 근대성의 구성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마녀라는 개념이나 마녀사냥은 사라졌지만 마녀를 만들어내고 마녀사냥을 추동했던 프레임은 여전히 남아서 작동하고 있다. 근대 국가를 지탱하는 논리 자체가 마녀 프레임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녀프레임은 특정 대상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항상 근대 국가를 이루는 논리에 내재해 있다.

    우리는 마녀사냥을 특정 시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 정치적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 현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체제에 위기 국면이 오면 언제나 이념으로 똘똘 뭉친 결사체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반대로 말하면 근본주의 창궐은 특정 체제에 위기가 닥쳤음을 반영하는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마녀사냥은 중세 가톨릭교회와 신앙심이 맞이한 위기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마녀사냥이란 “마녀를 살려두지 말라”라는 문구가 번역 문제에서 발생한 의미적 혼란 때문에 나타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발생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어 보여도 이것이 먼 옛날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언어의 투명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중세적 세계관 탓이다. 책에 쓰인 문자를 그대로 현실에 대입하며 언어가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것이다. 여하튼 이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마녀에 대한 이론 체계에 근거해서 마녀사냥을 벌였다.

    마녀를 악마화하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력은 바로 도미니크회Dominican Order였다. 도미니크회는 세계를 선악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상황으로 파악하고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이 서로 싸우는 아마겟돈 같은 상황을 상상했다. 마녀 이야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와 정확하게 반대를 이룬다. 예수는 중세에서 신앙심을 규정하는 척도였다.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하기 위해 호명된 것이 바로 예수라는 범주였다. 마녀는 정확하게 이 예수의 맞은편에 있는 상징이었다.

    지금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런 ‘증언들’은 악마학이라는 이름 아래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서 테크놀로지라는 불가사의한 능력에서 마법이라는 범주를 분리해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마녀사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희생자 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체로 20만 명에서 50만 명 정도가 처형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파악한다.9

    흥미로운 사실은 마법을 실행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 중에 절대다수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10 독일에서 희생자 중 85%가 여성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을 때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약했을 때였다. 이것은 권위 또는 권력에 공백이 발생했을 때 종교적 광기가 폭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녀사냥은 종교적 신앙심과 합리적 지식이 만났을 때 이 조합이 어떻게 순식간에 집단적 광기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단자라고 지칭한 이들은 기독교적 신념을 버렸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더 강렬한 신앙을 위해서 가톨릭교회가 타락했음을 비판하는 정치사범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영어로 성서를 번역했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 같은 경우도 종교재판 대상이었다.

    마녀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체계가 잡힌 순간 종교재판소는 그 기능에 자율성을 획득했고 자기 보전 욕망에 빠져들었다. 종교재판소는 새로운 배교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톨릭교회 교리에 도전하는 이단자들을 심판하던 역할에서 점점 확대된 종교재판소는 마법의 이단성을 도마 위에 올리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이들은 유태인과 무어인을 심판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하인리히 크라머Heinrich Kramer의 『마녀의 해머』라는 책은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내린 인준을 받고 제작되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인간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행을 마녀와 그 마법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이 책은 또한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완비하여 명실상부하게 마녀 지식을 집대성한 완결본이었다. 마녀를 색출하는 방법과 소추 방법 그리고 재판과 고문, 유죄 판정, 선고 방법까지 자세하게 안내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책이 출간되면서 마녀사냥은 더욱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여성이 마녀라는 명목으로 희생되었다.

    마녀사냥이 가속화한 것은 『마녀의 해머』라는 책이 출간된 사실과 맞물려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물론 이런 일은 이 책이 마녀를 규정하고 구체적인 마녀사냥 방법론을 기술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또 있다. 바로 인쇄술이다. 『마녀의 해머』는 인쇄술이라는 최신 테크놀로지 덕분에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대량으로 제작해서 배포할 수 있었다

    중세 유토피아주의가 몰락한 곳에서 마녀사냥은 공동체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되었다. 마녀들을 제거하면 공동체는 다시 과거처럼 평온을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마녀를 인간과 다른 종류로 규정하다가 여성에 대한 구체적인 열등성을 중심으로 마녀사냥 담론이 이동한 까닭은 공동체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시적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닥친 도전을 해결하기 위한 문화적 상징 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떻게 힘이 약해진 가톨릭교회가 마녀사냥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 이는 가톨릭교회가 강력하던 시절 오히려 마녀들에 대해 관대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즉 대중이 자발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면 마녀사냥 광풍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은 몰락해 가던 중세적 가치 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 말기를 뒤덮은 희망이 부재하는 상황과 염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세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모두 마녀들과 악마의 탓으로 돌리게 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확산하고 더욱 강화한 것은 놀랍게도 당시 첨단 테크놀로지인 인쇄술이었다.

    책이 보급되며 마녀에 대한 지식은 확산되었고 이렇게 마녀에 대한 ‘지식’을 보유함으로써 사람들은 더욱 확신을 갖고 마녀사냥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마녀의 해머』는 종교재판소의 지침서가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재판관들은 마녀재판을 진행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판타지 소설을 가져다 놓고 외계인을 판별하려는 조처와 비슷한 일이지만 당시에 이런 재판들은 사뭇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13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그때까지 위력을 발휘했던 중세적 질서가 일시에 전환하는 시기였다. 도시가 성장했고 생산을 위한 산업 기반이 조성되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출몰하면서 중세에서 볼 수 있었던 체계적인 질서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중세가 붕괴하도록 조장한 것은 다름 아닌 경제 발전이었다. 축적된 부는 중세적인 속박을 넘어설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기독교 왕국은 상징적 측면에서 로마를 중심에 놓고 저마다 지역들이 제 몫을 다하는 구조였다. 로마는 실제 공간이라기보다 영적인 원천이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위계 구조야말로 중세를 대표하는 세계 이미지였던 것이다. 이 세계는 중세를 정신에서 물질까지 일관되게 지배하는 하나의 이념인 기독교의 신을 중심으로 시계 톱니바퀴처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우주 질서와 서로 유비하고 있는 지상 질서들. 대우주는 인간이 살고 있는 소우주를 감싸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이런 질서에 심대한 균열이 발생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도시의 자율성은 곧 이질성이고 혼종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르네상스 도시에서도 일어났고 궁극적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중세는 완전히 종언을 고했던 것이다. 중세를 붕괴시킨 원인은 바로 도시라는 공간이었으며 거기에서 꽃핀 다른 가치를 체현한 혼종적 문화였다.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만든 인식적 근거는 아주 원시적인 ‘과학 지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지식이 중세의 테크놀로지였던 마법과 과학을 분리시켰던 것이다. 과학의 방법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증명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관찰’이었다. 아주 초보적이지만 마녀사냥도 이런 방식으로 마녀를 검증했다. 마녀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관찰을 통해 마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과학적 방법을 차용한 마녀에 대한 식별법이었다.

    일부 냉전 세력 인사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냉전 시절이 좋았다”라고 발언하는 것은 인식적 혼란과 도덕적 아노미 상태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서 정연한 세계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방법은 ‘색깔 논쟁’이었다. 색깔 논쟁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빨갱이 사냥’은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를 통제할 수 없을 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마녀와 마법은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모두에게 불쾌한 존재였다.

    마녀에 대한 인식이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가리지 않고 공통적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교리적 차별성을 넘어서서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음을 뜻한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강제나 복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발적 복종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하려면 즐거워야 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즐거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녀사냥을 바라보면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마녀사냥이 어쩌면 요즘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 게임과 흡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마녀사냥은 스포츠 게임과 달리 실제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와서 우리는 마녀사냥의 잔인성을 거론하지만 실제로 마녀사냥 과정에서 고통을 받은 희생자를 제외하고 대다수들은 이 사건을 즐겼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다.

    가치관 혼란을 극복하고 무너진 도덕적 경계를 다시 복원할 수 있는 길은 사회적 병리 현상을 낳은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다. 도미니크회 수사들과 종교재판관들이 만든 논리는 이러했다. 그 논리는 분명 과학적이었지만 그 원인 진단과 처방 실행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방법은 과학적이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교구 사제가 갖는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커진 조산부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갈등이 초래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권위에 대한 위협은 곧 세계질서가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했다. 도덕심이나 신앙이 중시되었던 조산부나 기도사가 부정한 행위자로 의심받을 경우 그에 대한 단죄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과학적 의학 지식은 중세 의학을 지탱했던 이론을 붕괴시킨 결정적인 동인이었다. 낡은 체계에 대항해서 완전히 새로운 의학 이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중세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질병 분류학 체계마저 의미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많은 과학 철학자가 지적하듯이 과학은 시대적으로 합의된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세 의학이 종언을 고하고 근대적인 의미에서 과학으로 부를 만한 의학 지식이 출현했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로 낡은 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합의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과도기를 통과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 훈련을 받은 전문가인 의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 증상들에 대해서는 ‘악마의 농간’ 같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원인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끝난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지만 논리는 간단하다. 의사는 자연적인 차원에서 환자가 보이는 증상을 파악하는 ‘과학자’이므로 의사가 판단할 수 없는 병은 초자연적인 차원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 문제를 다루는 의사는 초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발생한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합리성은 종종 비합리성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되고는 한다.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날 한국에서도 기시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일어나는 현실을 보자. 얼마 전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을 둘러싸고 보수 언론이 보인 태도는 비슷한 느낌을 준다. 침몰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보수 언론의 노력은 마녀사냥에서 작동한 논리 구조를 그대로 재현하는데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실들만을 취사선택해서 합리적으로 재구성한다는 측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말하자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누가’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사건을 일으킨 근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고 유혹적인 스펙터클을 조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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