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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8번째 책]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 - 황주환
    1000권 독서 2018. 9. 26. 19:08



    책 속의 한 구절


         오랜 가난과 절망으로 무기력에 빠진 아이에게 학교는 돌아올 만한 곳이었을까. 자기 삶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는 교과서와 수업, 밤 10시까지 딱딱한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자율학습, 조금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 규율의 감옥에서, 그렇게 삶 자체가 버거운 아이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나는 그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과 겉돌기만 하는 학교만의 문법에 아이는 돌아오고 싶어 했을까, 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이의 입장에서 학교가 어떤 곳이었을까, 한 번도 질문해보지 못했다.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학교란 우리 사회의 정확한 축약판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압축 반영되어 있다. 학교 역시 즐겁고 좋은 때도 당연히 있다. 선량한 교사들과 함께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 역시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학교의 고통이 상쇄되지는 않는다. 지금 학교는 붕괴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더 나은 학교를 만드는 것일 게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노예의 품성이었고, 교사가 된 내가 또 다른 노예를 제작하고 있었음을, 학교에 오래 있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이 사태를 뒤늦게 깨달은 현장 교사의 고백이다.

      

         이 책이 껄끄러운 독자가 있다면, 내 글이 일정 부분 성공한 것으로 여기겠다. 불편하지 않은 독서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편한 질문을 시작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수히 많다.

      

         학생에게 학교의 첫째 존재이유는 석차다.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이 석차경쟁을 위해 다른 많은 것은 포기했다. 자기를 느낄 시간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가 바쁘지 않은가.

      

         숨 막히는 경쟁에서 몸부림치는 학생들의 비명을 교사는 학생 인성의 타락이라고 이름 붙였다. 학생 인성이 타락해서 교육이 안 된다지만, 사실은 학교가 인성으로 내세운 복종과 규율이 학생의 일탈을 촉발해온 것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교사와 교육관료는 사태의 결과를 사태의 원인으로 뒤바꾸어 말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얻고자 한다.

      

         우리 모두 입만 열면 성토하는 교육문제란 무엇일까? 모두 어떤 교육을 바라기에 지금의 교육을 이토록 비판할까? 솔직히 말하자.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오직 입시문제만 있을 뿐이다.

      

         지금의 교육구조는 학부모 대중의 바람대로 교사들이 더 열심히 가르치고 채찍질할수록 오히려 전체 상황은 더 악화되는 경쟁구조다. 몇 개의 먹이를 두고 다람쥐들을 채찍질한다 해서 모두 그 먹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 속도만 빨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가문에서 태어났는가에 따라 일생이 결정되던 조선조 문벌의식처럼 대학입학증이 20세에 취득하는 신분증명서가 되었는데, 어느 누가 여기에 모든 것을 걸지 않겠는가.

      

         지금의 학교경쟁을 자유경쟁이라 말하지만 부모의 학벌과 자본이 자녀의 학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자녀는 그 학벌로 다시 부와 권력을 재생산한다. 이는 가문에 의해 출세가 결정되던 조선조 문벌권력처럼 불공정한 게임이다.

      

         학교의 석차경쟁은 ‘지금 노동의 몫’을 못 보게 한다는 점에서 소수 승자의 독식과 대중의 억압을 상식으로 여기게 하는, 아주 효율적인 이데올로기다. 즉 대중의 사회노동을 대중 스스로 무가치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의식화 과정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모두가 교육고통을 말하지만, 모두가 이 교육체제에서 실패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교육시스템에 유리한 사람들은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국가운영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학교가 사교육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과 학벌의 독점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해결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대중이 선진 교육구조를 알지 못하니 권력자들은 초중등 의무급식조차도 좌파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교육고통은 공부하지 않은 무지 때문이다. 다시 공부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을 전부로 여긴다면 어떤 변화도 없다.

      

         한국사회의 교육 혹은 입시문제란 공포와 닿아 있다. 지금 학교경쟁이란,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귀다툼이다. 이 다툼은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 등 사회공공성과 안전망 없이, 오직 개인에게 생존을 맡긴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대학이 먹고사는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경쟁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사회이기에, 그 차별을 몸으로 겪은 부모들이 자기처럼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까봐 아이들을 석차경쟁으로 떠민다.

      

         교육예산 증액에 의한 교원확충과 학급당 학생 수 감축, 교장선출 보직제 및 인사제도 개선, 의무급식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을 주장한다. 이들은 당연히 실현되어야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이 이루어져도 학생들의 지옥 같은 석차경쟁은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

      

         일한 만큼 공정한 대가, 즉 노동임금을 정직하게 주는 사회를 만들지 않고는 지금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학력과 학벌이 아니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지옥 같은 학습노동과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뿐이다. 어머니가 병들어도 아이들은 밥을 굶지 않고 아버지가 실직해도 아이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는, 말하자면 부모의 능력에 따라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말이다.

      

         공정한 사회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엔 항상 자기 몫의 가감加減이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문제는 계급문제가 된다.

      

         지금 우리의 이 고통은 답이 없어서가 아니다. 간절한 물음 없이 주어진 해답은 현실적 힘을 담보하지도 추동하지도 못하고, 그냥 스치는 소란으로 그쳐왔다. 내 고통의 뿌리에 닿지 못한 질문은 쉽게 방향을 잃어버린다. 정확한 질문은 내 고통을 정확하게 아는 것에서 나온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오직 교사에게만 적대적인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자기 삶의 버거움을 교사에게 적의와 반항으로 전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날 새벽에 내 잠자리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내가 아이에게 준 상처 때문이 아니라, 자기통제를 상실한 나의 초라함 때문이었다. 아이의 고통은 내 것이 아니었다.

      

         교사는 체벌금지를 교권의 상실이라 한다. 그런데 체벌로 확립되는 교권이란 이미 초라한 것일 터이고, 또 체벌이 허용되지 않아서 지금처럼 교권이 추락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체벌금지와 교권을 양립할 수 없는 모순개념으로 볼 때, 학생과 교사 모두가 불행해진다

      

         학생인권과 교권은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라 모두 보장받아야 할 인권에 속한다. 무한경쟁의 학교문화와 과밀학급의 해소, 과중한 업무의 경감과 전문 상담교사의 배치 등으로 교권과 학생권을 함께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교사들이 요구할 교권이란 학생을 때릴 권리가 아니라, 인간적 만남이 가능한 학교를 국가에 요구할 권리가 되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기술이듯 사랑도 기술이라며 사랑에 대한 지식과 노력을 줄곧 강조한다. 20대 초반 처음 읽었을 때, ‘사랑은 노력’이라는 그의 명제가 참으로 상투적이었다. 그런데 다시 읽을 때마다 “사랑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라는 그의 지적이 깊게 다가왔다.

      

         프롬은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부모는, 자녀가 부모를 평가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부모보다 더 나쁘다고 지적한다. 그런 부모는 자기의 희생만큼 자녀를 사랑하다 여기지만, 사실은 부모가 자녀를 소유하려는 자기중심적인 지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란다. 아이는 숨이 막히는 것이다

      

         프롬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어 나오듯이, ‘아이의 독립을 도와주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이 사랑이라고 계속 강조한다. 자기 삶의 뿌리가 튼튼한 어머니, 즉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이를 독립과 성장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결핍감, 훼손된 자기존중감, 그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상처받았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는 자기가 무시당했다며 쉽게 폭력을 행사하고, 억압된 분노를 친구에게 내쏟는다. 자기보다 약한 아이를 왕따시키고, 부모에 대한 분노를 교사에게 전이해 과도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비슷한 친구들과 동네를 떠돌다가 가출을 반복하고 학교를 그만둔다.

      

         교사에게 허락된 것이 있다면,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을 보충해주는 것, 이것이 교사가 학생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일 테다. 교사는 부모가 채워주지 못한 믿음과 지지를 보충하고 대리하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그래서 가장 진부한 이야기지만, 사랑과 교육은 다르지 않다고 말해본다.

      

         아이들은 폭력과 자살 그리고 무기력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자기 삶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는 교과서와 교실 수업에서, 그렇게 자기 삶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무력하게 학교를 오가고 있다. 공부 잘하는 것만을 최고로 여기는 학교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깊이 상처받았고, 반면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그 자리에 오르느라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대부분 아이들이 군데군데 병들었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대개의 어른들은 ‘나도 그런 학교를 다녔다’며 이를 청소년기 성장통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오늘의 학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잔혹하다. 지금 학교는 지옥이고, 병든 것은 아이가 아니라 학교다.

      

         일상화한 사회폭력이 학교까지 밀려들어온 것뿐이다. 그런데도 한국사회의 그 폭력에는 무감한 채 단지 학교폭력에만 분노하는 그들이야말로 위선적이고 무지하다고, 지금 나는 말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자본과 권력을 가진 소수가 현실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과두체제로 접어든 지 오래인데, 이것이 낯설지 않은 것은 학교에서 그것을 이미 선행학습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교사들이 총학생회장이나 학급임원을 선출할 때, 일정 성적 이상이나 모범생으로 자격을 제한하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과두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학교 현장에서 숱하게 봐온 장면에 비추어 말하면, 교사가 학생을 분류하는 기준은 오직 한 가지, 충직함이다. 자기 말을 따르면 모범생이고, 따르지 않으면 문제 학생이 되는 간단한 구분법이다. 이 가운데 자기 가르침이 옳은가 고민하는 교사는 내가 경험한 바로는 소수다. 교사는 자기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왼손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예수 시대 왼손은 더러운 일에만 사용했기에 공공장소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욕의 의미로 왼손을 사용한 상대방에게 다른 쪽 뺨을 돌려댄 것은,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상처 날 만큼 힘껏 내리쳐봐라” 하는 것이다. 상상해보라. 모욕당했던 유대인이 ‘이번엔 진짜 때려 봐라’ 하는 것은 맞아 쓰러진 사람이 벌떡 일어나 ‘또 때려봐라!’ 하는 것처럼, 순종이 아니라 저항에 가깝다.

      

         당시 사회는 맨몸을 드러내는 것이 금기사항이었기에, 힘 있는 자가 속옷을 빼앗으려 할 때 겉옷까지 벗어주는 것은 끝까지 가보자는 것이다. 또 로마인이 유대인을 천 걸음까지 부역시키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그 이상은 역시 금지되었다. 그래서 이런 행동들은 규정과 금지를 위반하도록 상대를 유도해, 강자를 당혹에 빠뜨리려는 예수시대 약자의 저항이기도 했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지배계급을 향한 분노와 짝패를 이룰 때 그 의미가 가장 분명해진다. 이것으로 예수는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강자의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것 역시 사랑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200년 전 저 먼 땅 프랑스혁명의 단두대는 가르치더라도 30년 전 이 땅 광주의 학살은 가르치지 않는 것에서, 교과서는 이미 정치적이다.

      

         교과서는 일제억압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었다고 설명한다. 일제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반복하며 국익을 말한다. 그래서 지금-여기의 억압과 모순이 눈에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마치 우리 모두의 이익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며 우리 안의 수많은 진짜 갈등의 경계는 흐릿해져버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중이 진짜 저항을 학습하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한다. 저항을 학습한 대중이 지금 이곳의 진짜 억압에 저항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질문은,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로 묶이는 국익이란 처음부터 없다. 여성과 천민을 억압한 조선조 사회가 국익을 말하며 남성/양반의 이익만을 앞세웠듯이, 지배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국익이라 말해왔을 따름이다.

      

         20년 교직 생활에서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학교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교육은 불가능하고 중립의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저항’을 철저히 삭제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교과서야말로 철저히 정치적이고 파당적이라는 것이다.

      

         학교가 항상 말해온 정당한 국가, 반듯한 국민, 모두의 이익이란 그들만의 부와 권력을 위한 환상의 언어라는 것, 갈등 없는 세상이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적대가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다

      

         우리나라 99퍼센트의 사립학교가 교직원 임금, 건물 신축비와 증축비, 각종 교구와 운영비 등 학교예산의 거의 100퍼센트를 국민 세금에서 지원받지만, 폐쇄적 운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숱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가는데, 아마 그 실태를 낱낱이 들여다본다면 상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분노를 느낄 것이다.

      

         대중은 자기 이익을 표현할 자신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다. 사립학교법, 세금,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동자, 파업, 계급, 자본, 국가, 인권 등 이런 언어의 실체와 사용법, 즉 이들 언어의 정치적 의미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던가? 이 언어들이 누구의 현실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이 언어들의 정치적 좌표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학교 밖에서라도 따로 공부한 적이 있던가.

      

         학교와 언론이란 것이 바로 대중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몸통이지 않던가. 그렇게 국가-자본이 제시하는 언어로만 한국사회를 학습한 대중은 자기의 진짜 언어, 진짜 이익과 멀어지게 되었다.

      

         자기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타인의 언어로만 생각할 뿐이고, 타인의 언어로는 결코 자기 이익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욕망을 내 것으로 학습받아왔다. 그래서 ‘나’의 정치적 이익을 배반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누군가 의도하는 대로 정치문맹으로 남게 되었다.

      

         모든 것이 교육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지시받고, 허락하고 허락받는 학교의 일상이다. 자기 생각과 몸과 욕망은 비워놓고, 오직 타인(권력)의 말에 맞추기만을 학습받아온 이 아이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온전히 자기 생각과 말을 되찾는 것일까? 이들이 권력과 자본이 펼쳐놓는 온갖 달콤한 말들이 기만임을 깨닫고, ‘아니오’라고 자기 말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이익을 계산하고 주장하고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을까.

      

         학교란 원래 그런 목적으로 생긴 것이다. 근대교육의 발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맞는 노동력 공급에서 시작되었다. 학교는 시간과 공간을 쪼개어 행동을 통제하고, 위계적 감시와 규율로 공장노동자를 주조鑄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노동력을 가졌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복종할 수 있는 인간을 훈련시키는 곳이 근대적 학교의 기원이다. 그러다가 점차 증대하는 노동자의 욕구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제 학교는 그 두 힘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우리의 교육은 한 번도 주체적 민주시민교육을 한 적이 없고, 대중을 국가의 충실한 마름이나 자본의 소모품으로 의식화시켰다. 국가-자본은 자신의 힘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인 ‘복종과 경쟁’의 논리를 학생들에게 강제해왔다. 이때 교사에게 허락된 선택은 두 가지다. 국가-자본의 최말단 전도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복종과 경쟁을 충직하게 반복 이식하거나, 또는 이를 거부하다가 핍박받는 것뿐이다.

      

         모든 교사는 정치적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기에, 중간은 없다. 말하자면 정치의 바깥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교사는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Homo Politicus’을 깨닫지 못한 것이고,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교사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타인의 언어를 자기 언어로 주입받아온 대중이 자기 이익을 계산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말하자면 교사는, 대중의 정치적 배반을 설명해온 관념적이고 전문적인 언어를 ‘아이들의 일상언어’로 번역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 삶의 구체성과 연결’지어 자신의 언어를 찾을 수 있도록,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매일매일 학생들의 언어로 실습해야 한다.

      

         중립을 가장하지 않는 교사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교과서 안에만 머물지 않고 교과서 언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학생들에게 자기 언어를 되찾으라는 교사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권력에 순종하지 않은 수백 명의 교사들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교단에서 ‘정치적으로’ 쫓겨났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해고는 곧 살인이라 하듯이 수백 명의 목이 뎅겅뎅겅 잘려 인터넷 저자거리에 돌림을 당했다.

      

         권력은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징그럽게 날뛰지만, 힘 앞에서는 온순해지고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권력은 대화하지 않는다. 권력은 권력과만 협상할 뿐이다.

      

         세상을 바꾼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인 소수가 세상을 변화시켰지만, 그 열매는 모두가 누려왔다. 그런데 만약 지금 내 수고에 따른 지분을 주장하고 싶다면, 오늘날 내가 누리는 숱한 권리들을 위해 앞서 피 흘린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지분을 치러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말만 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자기의 아름다운 말이 곧 자기 인격의 표현이라 믿고 싶겠지만, 이는 “차카게 살자”처럼 자기과시에 불과하다. 더구나 모두에게 베푸는 아름다운 말이란,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아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불의한 현실과 부당한 권력 앞에서도 아름답기만 한 말이란 알랑거리는 낯빛으로 권력의 비위나 맞추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일 뿐이다.

      

         왜 우리는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주장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왜 우리는 부당한 지시에도 충직하기만 한 것일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지 않던가! 우리는 나서지 않고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학습받아왔다. 자기 의견을 주장하거나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교육받아왔다. 저항이 어떻게 정의가 되는지, 저항이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고 평화가 되는지를 배운 적이 없었다.

      

         인간은 고립감을 견디려고 자기 스스로 외부의 힘에 복종하는 마조히즘적 성향과,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의존시켜 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사디즘적 성향이 있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고 모두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외부의 힘에 옭아매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본능적으로 감행한다고 에리히 프롬은 지적했다

      

         미국의 실천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교육을 많이 받고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일수록 거짓말과 사회모순들을 기꺼이 수용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지적대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사회상층부에 진입하여 체제의 수호자가 된다. 그들은 이미 권력의 욕망을 내면화했기에 부끄러움을 가르치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의 대중은 선거권을 행사한 자신이 권력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지배당한다. 단지 지배의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자본과 정치의 지배권력은 그들 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규정하고 교육을 통해 대중에게 스며들게 한다

      

         지배계급의 의식은 교육, 미디어, 법제도, 대중문화, 종교 등을 통해서 대중에게 올바른 것으로 이식된다. 그 지배계급의 의식이 대중에게 교육되고 주입될수록 그것은 상식이 되고, 대중은 그 상식을 따르는 것으로 결국 지배에 동의하게 된다. 오늘날 지배는 철저히 대중의 동의에 의해, 즉 대중의 자발적 복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hegemony 이론이다.

      

         사회가 아무리 불의해도 앞에 나서지 말고 순종하는 것이 올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이것이 바로 예절의 껍질을 덮어쓴 억압과 복종의 프로그래밍이다. 부당함에 항의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시끄러운, 융화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며 누가 눈살을 찌푸리던가.

      

         지배권력의 언어를 학습한 대중에게 가난은 개인의 책임일 뿐이다. 자본의 착취를 알지 못하고, 개인의 성실만을 올바르고 도덕적인 삶으로 알고 있다. 복지정책은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 부도덕’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왜 질문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지배권력인 학교와 지배자본인 미디어가 던져준 언어로만 생각하고, 왜 자기 언어로 질문하지 않는가? 학교의 언어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매일매일 방송은 누구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냐고 매번 질문해야 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질문”이다. 질문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물음이 간절하면 답은 함께 있는 것이다. 물음이 간절하지 않으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이다

      

         교양인의 독서는 전문가와 다른 방식을 취하는데, 대체로 밑으로 밑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옆으로 발을 벌리는 형국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수록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역설을 깨닫게 되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교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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