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한 구절
공부하는 삶은 금욕과 의무를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한다. 공부하는 삶은 보상을, 그것도 충분한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공부하는 삶은 초기에 노력을 요하는데, 그것을 해내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은 일반적인 욕구다. 그러나 그것은 비겁한 심장과 나약한 두뇌의 욕구다. 투덜거리는 요구에 곧바로 우주가 응답하는 경우는 없으며, 끈질기게 노력하지 않는데도, 공부하려고 켜놓은 등불 아래로 신이 빛을 비추는 일은 없다.
그들은 공부를 하지 않거나(그렇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공부를 하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도 모른 채 형편없고 변덕스럽게 한다.
이해하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과 아무렇게나 나아가는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는가! ‘천재성이란 오랜 인내’라고 할 때 그 인내는 조직적이고 총명한 인내여야 한다
어떤 공부를 해내는 데에 비범한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평균 정도의 자질만 있어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에너지와 그 에너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에 달려 있다. 정성을 들이며 착실히 일하는 노동자처럼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 노동자가 어딘가에 도달하는 동안 독창적인 천재는 대개 쓰라린 낙오자로 남는다.
가장 소중한 것은 의지, 깊게 뿌리박은 의지다. 누군가가 되고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의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유한 이상을 지향하는 그 누군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의지다.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언제나 부차적이다.
나는 많은 이들이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 매일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단언했다. 제한된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법을 배워라. 갈증을 씻어주는 동시에 다시 목마르게 하는 샘에 매일매일을 쏟아부어라.
인격적 자질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 지적 능력은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지적 능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효과의 본질이 결정된다
인격이 난파된다면 틀림없이 위대한 진리를 인식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더 이상 통제받지 않고 더 이상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정신은 위험한 비탈을 굴러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다. 출발점의 작은 실수가 마지막에는 거대한 파국이 되는 법이다.
진리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데, 덕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과 복종이 없다. 그런 까닭에 천재는 잠재적인 단점이 있더라도 이미 덕이 높은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아직 모르는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리를 얻는다. 그렇게 진리를 얻는 것은 그 자체로 다른 보상을 가져온다
사유가 순수하려면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앎의 초심자는 이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목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목표들은 모두 하나의 궁극적 목적에 의존한다. 참된 것과 연합하는 것, 참된 것과 하나인 것도 이 궁극적 목적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개별성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편적인 것에 참여함으로써 진리에 접근한다. 보편적인 것은 참된 것이자 선한 것이다. 우리가 이 보편적인 것을 선한 것과 똑같이 인정하고 섬기지 않으면, 보편적인 것을 참된 것으로 찬미할 수 없다.
태만은 호기심과는 다르다. 태만은 우리의 가장 좋은 본성들에 은밀히 스며들어, 그 본성들을 채워주는 척하면서 오염시킨다.
야심은 면학을 해치고, 공부를 통해 유익한 성과물을 내놓는 것을 가로막는다. 앎에 대해 야심을 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앎의 추구가 아니며, 그 야심에 빠져든 사람은 지성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다른 모든 그릇된 목적도 이와 같은 평결을 받을 것이다.
공부하는 이는 무엇보다 신의 창조물에 대한 숭배와 기도, 명상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공부는 그 자체로 성스러운 의무다. 공부하는 이는 자연이나 인류를 탐구하면서 창조주 혹은 그 이미지의 흔적을 샅샅이 찾고 찬미한다. 그러나 알맞은 때에는 공부를 멈추고 신과 직접 교통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크나큰 임무를 경시하거나 잊어버린다면 신의 이미지는 우리와 신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고, 신의 흔적은 우리를 지켜보는 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갈 것이다.
잘 살려는 노력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천재들 가운데 일부는 비참할 만큼 건강이 나빴다. 만일 신의 뜻에 따라 당신의 건강이 나빠진다면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잘못으로 건강이 나빠진다면 그것은 신을 시험하는 아주 큰 죄다.
매일 운동해야 한다. 잉글랜드 의사의 격언을 기억하라.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반드시 아픈 시간이 있을 것이다.”
사유하는 이는 소화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은 자기 신체의 적이기에, 머지않아 자기 영혼의 적이 된다. 금욕은 공부에 꼭 필요하며, 그 자체만으로도 그라트리 신부가 말한 ‘선명한 시야의 상태’에 우리를 이르게 할 수 있다. 육욕에 복종한다면, 정신이 되어야만 하는 당신은 육체가 되는 길 위에 서는 것이다.
시간과 사유, 자원, 역량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과의 그물에 뒤엉키지 마라. 관습을 고분고분 따라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안내자가 되어 관습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라. 지성인의 신념은 그가 달성하려는 목표와 일치해야 한다.
소명은 집중을 뜻한다. 지성인은 성별된 존재이므로 헛된 일을 하느라 자신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잡아먹는 그 작은 존재들이 시시때때로 졸라대고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이들은 귀찮게 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기운을 북돋운다. 아이들은 당신의 영감을 기쁨으로 물들여 고무하고, 자연과 인간을 사랑스럽게 반영하여 당신이 추상으로 빠지는 것을 막는다.
“천천히 말하고, 응접실에 갈 때는 천천히 가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일절 궁금해하지 마라.”
“모두에게 공손히 대하라.”
그러나 “누구와도 친밀하게 지내지 마라. 지나친 친밀함은 경멸을 낳고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원인이 된다.”
“세상 사람들의 언행에 분주히 참견하지 마라.”
“무엇보다도 무익한 외출을 피하라.”
“포도주 저장고에 들어가고 싶다면 너의 작은 방을 사랑하라.”
말을 천천히 하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장소에는 천천히 가라. 말을 많이 하면 물이 쏟아지듯이 정신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온화하게 대함으로써 당신에게 이로운 소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임에 자주 방문할 권리를 얻어라. 그렇지만 지나친 친밀함은 우리를 목표에서 벗어나게 하므로 그들과도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은 삼가라. 정신을 헛되이 사로잡는 소식을 좇지 마라. 도덕 혹은 앎과 전혀 관련이 없는 세상의 언행 때문에 분주히 움직이지 마라. 시간을 잡아먹고, 정신을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로 채우는 쓸데없는 외출을 삼가라. 이런 것들이 신성한 일, 즉 고요한 묵상의 조건이다.
세상의 모든 생물을 살펴볼 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상서로운 어둠 속에서 별들의 재료를 준비하는 일은 신처럼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해야 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부상을 입고 길가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었듯이, 지성인의 이웃은 진리가 필요한 사람이다. 진리를 나누어주기 전에 먼저 스스로 그것을 얻어라. 그리고 파종할 씨앗을 낭비하지 마라.
사유하는 사람인 당신은 반드시 세상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평정을 잃는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사유, 의지를 멈춘 사유가 몽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비현실적인 몽상은 추상적 사유의 암초다. 무기력과 실패의 원인인 이 암초를 피해야 한다. 발이 땅을 딛듯이, 절름발이가 목발에 기대듯이, 사유는 현실에 근거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경험을 제공하는가! 우리는 경험을 흘려보내지만 깊이 있는 사상가는 경험을 모아서 자신의 보물로 만든다. 경험은 서서히 그의 사유의 틀을 채울 것이고, 그의 보편 관념은 실례를 토대로 검증되고 예증될 것이다.
고요의 정신은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한다.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흔히들 고독은 결실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실의 어머니는 엄밀히 말해 고독이 아니라 고독한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두 시간의 공부에 바탕을 둔 지적인 삶을 생각할 수 있었다.
지성인에게 권하는 고독은 고독한 장소라기보다는 고독한 묵상이다. 고독은 사태에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태에 초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아지경으로 고차적인 것에 몰두하고, 경솔한 언동, 종잡을 수 없는 관념, 변덕, 난잡한 공상을 피함으로써 자신을 고양하는 것이 고독의 관건이다.
당신이 내적 영감과 신중함 그리고 스스로 기꺼이 헌신하는 사랑을 간직한다면, 진리인 신이 당신과 함께한다면, 당신은 우주 한가운데서도 혼자일 수 있다.
기도는 욕구의 표현이다. 기도의 가치는 내적 염원에서, 그 염원의 성격과 힘에서 생겨난다. 욕구를 없애면 기도는 멈춘다. 욕구를 바꾸면 기도는 변한다. 욕구의 세기를 키우거나 줄이면 기도는 날아오르거나 날개를 잃는다. 그러나 욕구는 남겨둔 채 표현을 없앤다 해도 기도는 여러 방식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우주의 활동에 동참하는 습관을 들여라. 보는 법을 배워라. 눈앞에 있는 대상을 익숙하거나 은밀한 관념과 비교하라. 마을에서는 주택만 보지 말고 인간의 삶과 역사를 보아라. 화랑이나 미술관에서는 작품만이 아니라 예술과 삶의 양식, 운명과 자연의 개념, 기법과 영감과 감성이 계승되거나 바뀌는 추세를 보아라.
여행을 하면서는 인류에 관해 들어라. 풍경을 보면서 세상의 위대한 법칙을 떠올려라. 별들에게서 무한한 시간에 관해 들어라. 오솔길 위에서 조약돌을 보면 그것이 대지 형성 과정의 잔여물임을 떠올려라. 한 가족을 보면서 지난 세대들을 생각하라. 동료들과의 최소한의 교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최상의 개념에 빛을 비추어라. 그렇게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평범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사상가는 여과기와 같아서 진리는 그를 통과해 지나가면서 가장 좋은 알맹이만을 남긴다.
현명한 사람의 정신은 언제 어디서나 보통사람들이 간과하는 것도 습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게 가장 소박한 일은 가장 고결한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에게 의례적인 방문은 탐구를 위한 좋은 기회다. 그에게 산책은 발견하러 떠나는 여행이다. 그가 조용히 듣는 것과 대답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진리와 나누는 대화다.
인간이 그렇게 변하는 것은 잠에서 깨는 순간과 아침 명상의 순간이다. 잠에서 깨는 순간 일정한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훌륭한 습관이다. 큰 소리로 기도하면 더 좋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목소리는 자기암시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역도 맡기 때문이다. 그 대역은 우리가 무시하지 못할 ‘충복’이다. 그는 우리가 부여한 권위를 가지고 있고, 바로 우리이며,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인 그의 목소리는 기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한다.
시간을 줄여서라도 집중해서 사용하는 편이 나으며, 그것이 공부의 핵심이다.
무언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지 마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력을 다하고, 계속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정력적으로 하라. 반쪽짜리 공부와 반쪽짜리 휴식은 공부를 위해서도 휴식을 위해서도 이롭지 않다.
그렇게 공부에 열중하면 영감이 찾아온다. 영감은, 언제나 진실한 노력에 순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그런 노력을 알아챈다
평범한 이들은 꾸준히 공부하면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시간이 두 시간에서 여섯 시간이라고 어림한다. 핵심은 시간이 얼마냐가 아니라 어떤 정신으로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고독을 방해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치열하게 맞서서 고독을 지켜내야 한다. 의무가 있다면 평상시에 이행하라. 친구가 있다면 적절한 때에 만나라.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방해한다면 정중하게 문을 닫아라.
공부하는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는 것뿐 아니라 방해받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시간을 완벽하게 지켜야 공부에 열중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아무리 철저하게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학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주제는 다른 주제를 밝혀주며, 지적인 논문은 어떤 학문에 관한 것이든 어느 정도 다른 모든 학문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열려 있으면서 진정으로 강하고 맑은 정신을 갖고 싶다면 시작 단계에서 자신의 전공을 굳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 닿고자 하는 높이에 맞추어 토대를 놓고, 닿고자 하는 깊이에 맞추어 입구를 넓혀라
전문가이기 이전에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람은 펜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지독하게 무지한 그는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방랑자처럼 되고 만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기이하게 살아가는 바보다.
철학이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학문들은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노력을 헛되이 낭비하게 된다. 신학을 모르는 철학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결론을 내지 못하며, 비판의 기준과 역사 탐구를 위한 토대를 전혀 갖추지 못한다
공부하는 삶이 쉼 없는 재주넘기여서는 안 된다. 기쁘게 공부하는 것, 적성에 맞는 길을 따라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처음에는 여러 길을 따라가면서 적성을 발견해야 하고,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당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 자신을 가늠하고, 당신의 과업을 가늠하라. 몇 번의 실험을 거친 뒤에는, 경직될 필요까지는 없지만 마음을 다잡고 당신의 한계를 받아들여라. 독서와 어느 정도의 글쓰기를 통해 지식의 여러 영역을 둘러본 초기 공부의 이점을 유지하되, 당신의 전공에 대부분의 시간과 힘을 쏟아라.
반쪽짜리 정보를 가진 사람은 사태의 절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어중간하게 아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자 결심한 것을 아는 데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곁눈질만 하라. 다른 이들의 소명을 대신하려다가 당신 자신의 소명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인간 정신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다. 오직 게으름만이 정신의 지혜와 창의력을 제한한다.” 우리가 장애물이라 여기는 것은 대개 우리의 잘못과 태만으로 이루어진 덤불에 지나지 않는다.
허겁지겁 읽는 것, 자제하지 못하는 습관, 정신을 해치는 과도한 마음의 양식,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쉽고 익숙한 다른 이들의 사유에 안주하는 게으름은 금해야 할 것들이다.
지나치게 읽는 정신은 양분을 공급받기는커녕 오히려 둔해지며, 서서히 성찰하고 집중하는 힘을 잃어버려 결국에는 산출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정신은 내면을 향해 점점 더 외향적이 되고, 밀물 썰물처럼 흐르는 관념과 내면의 이미지에 열렬히 집중하며 그것들의 노예가 된다.
무절제한 기쁨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것이다. 그 기쁨은 지성의 기능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유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 혹은 단어·문단·장·책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실려가는 것만을 허락한다.
끊임없는 시각적 자극은 정신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원인이 된다. 대단한 독서가가 자신의 눈과 뇌를 혹사한다면, 그가 진정한 공부를 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지혜롭게 공부하는 이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명석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과 유용하게 쓰일 것만을 정신에 간직하고, 뇌를 신중하게 관리하며 뇌에 아무것이나 쑤셔 넣지 않는다.
넘치게 읽기보다는 밖으로 나가서 자연이라는 책과 함께 상쾌한 공기를 들이쉬면서 긴장을 푸는 편이 낫다. 꼭 필요한 활동을 마친 뒤에는, 지적으로 보일 뿐인 습관에 기계적으로 빠져드는 대신 꼭 필요한 휴식을 준비하라.
성찰할 수 있을 때는 절대 읽지 마라. 휴식 시간 이외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와 관련이 있는 것만 읽어라. 그리고 내면의 고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적게 읽어라.
당신이 좋아하는 것, 당신을 너무 들뜨게 하지 않는 것,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해롭지 않은 것을 읽어라.
독자는 읽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읽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정신을 형성하기 위해 읽는 것에 반응해야 한다. 우리는 사유하기 위해 읽고, 사용하기 위해 재물을 얻고, 살기 위해 먹는다.
언제까지나 읽기만 하는 기계적인 정신활동, 즉 더 이상 진짜 공부가 아닌 지적인 자동성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독자를 비판했다. 그러나 많이 읽는 독자만 수동적인 습관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책은 뜨개질과 같다. 그들의 정신은 일종의 나태에 빠져서 “양치기가 꾸벅꾸벅 졸면서 흐르는 개울을 보듯이”(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뮈세Alfred de Musset의 말) 관념들의 행진을 무기력하게 방관한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수 없다. 책은 우리에게 진리를 제시할 뿐, 그것을 소화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는 것이다. 우리 정신의 임무는 반복이 아니라 이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읽는 것을 ‘붙잡아야’ 하고, 몸으로 흡수해야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스스로 공부해야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는 세상에 새로운 사유를 보탤 수 없다는 것은 더더욱 참이다
절제하는 자세로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에 노트하라.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 일시적인 선입견의 효과, 이따금 화려한 문장 때문에 생기는 열광을 피하기 위해 구절을 곧바로 옮겨 적지 말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적어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침착하게 수확물의 가치를 판단한 다음, 질 좋은 곡물만을 헛간에 저장하라.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입장과 문제를 뚜렷이 보기 위해,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면서 정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주의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써야 한다.
문체가 갖추어야 할 특성을 무한정 나열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 세 단어로 그 모든 특성을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진실, 개성, 간결함이다. 단 하나의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진실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공부하는 모습과 휴식을 취한 후 재빨리 과업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그리고 이 주기를 꾸준히 반복하는 모습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일을 포기하고 추수를 그만두는가! 그렇게 포기한 사람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공부를 추구하는 이들이 처음 치르는 시험은 참가자를 떨어뜨리는 시험이다.
견디는 것은 의지로 해내는 것이다. 견디지 않는 사람은 계획만 세울 뿐 의지로 성취하지 못한다. 손에 쥔 것을 놓는 사람은 진짜로 잡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