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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3번째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 채사장
    1000권 독서 2018. 9. 1. 13:39
                                                            



    기억해야 한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일수록 사회는 그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내적 성장, 당신의 영혼, 당신의 깨우침, 당신의 깊은 이해. 그 어떤 것도 사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가정과 학교의 보호 속에서 제대로 된 실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자신이 실패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하지만 세상은 당신과 그런 방식으로 관계 맺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하나의 전문직을 가져라’, ‘평생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를 가져라’,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라’, ‘언제나 노력하고 나태해지지 말라’ 하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것밖에는 없는 빈곤하고 겁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 속의 한 구절

    만약 네가 짐승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파괴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 밖으로 걸어나가서, 그것에서 벗어난 뒤, 다른 것을 둘러보야만 한다. 그것은 비단 입시뿐만이 아니다. 전공이 되었든, 업무가 되었든, 모든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아닌 것들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궁극의 지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여 마지막에 반드시 얻게 될 삶에 대한 이해. 그 궁극의 지식은 몇몇의 책에서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 한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일수록 사회는 그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내적 성장, 당신의 영혼, 당신의 깨우침, 당신의 깊은 이해. 그 어떤 것도 사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에 의해 해석된 무엇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을 ‘실재론자’로,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관념론자’로 이름 붙여서 구분짓는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러한 용어로의 분류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다
      
    객관적이고 독립된 세계는 나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해석한 세계에 갇혀 산다. 이러한 자아의 주관적 세계, 이 세계의 이름이 ‘지평地平, horizon’이다. 지평은 보통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말하지만,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자아의 세계가 갖는 범위로 사용한다.
    즉, 지평은 나의 범위인 동시에 세계의 범위다. 우리는 각자의 지평에서 산다.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한다며 젊은이들에게 세계로 나갈 것을 권유하는 어른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에도 자기 기반이 남아 있는 다급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고,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라는 말은 어쩌면 그들을 더 위축시키는 하나의 압박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충동적으로 내던질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가볍지 않다.
    그래서 궁금하다. 도대체 삶은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인지. 이 무거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
      
    이곳에서의 여행도. 가끔 인생이 몇 년이나 남았을까를 가늠해본다. 30년, 혹은 40년 정도겠지. 그러면 생각해보게 된다.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돌아가는 날에는 어떤 이야기를 가져가야 할지를. 그래서 갔다 오라고 했다. 어느덧 어른스러워진 동생에게. 더 어른스러워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많은 노동의 결과물을 모으기 전에, 여행을 시작해보라고 말해준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은 자신이 목표로 삼은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통념과는 반대로 흔한 것은 이들이다. 한 가지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한 가지 목표에 모든 것을 거는 행위다. 이들이 한 가지에 몰두하는 이유는 이들이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반대로 이들이 나약해서다. 현실에서의 경험이 부족하고 세계의 복잡함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이들은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무언가 분명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고 이것에 집중하겠다는 단순한 전략을 세운다.
      
    그래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한 가지 전략으로 대응하는 적처럼 우스워 보이는 것은 없다. 세상은 이들을 쉽게 쓰러뜨린다. 진짜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쓰러진 이유를 오해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재도전을 다짐하며 또 다시 이렇게 말한다. 예전의 나는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한 가지에 모든 것을 거는 이가 실패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포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의 보호 속에서 제대로 된 실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자신이 실패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하지만 세상은 당신과 그런 방식으로 관계 맺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하나의 전문직을 가져라’, ‘평생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를 가져라’,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라’, ‘언제나 노력하고 나태해지지 말라’ 하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것밖에는 없는 빈곤하고 겁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
      
    집착 때문이다. 나의 신체와 내가 가진 것에 마음이 쏠려 한시도 잊지 못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나의 몸과 나에게 연결된 것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유일한 것이라서 그것이 어찌 될까 봐 조마조마해 하고, 움켜쥐려 하고, 끝내 감싸 안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이 된다.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버거운 이유, 내 삶이라는 게 남의 삶보다 더 고된 이유, 내가 손에 쥔 것이란 남이 가진 것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이유, 나의 삶은 이상하게 번잡하고 고통스러웠던 모든 이유는 그래서였던 것이다
      
    나는 과거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두 종류다. 어떤 사람들은 후회 속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그리움 속을 살아간다. 그의 과거는 강력하게 현재와 미래를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하나의 과거가 된다.
      
    나는 미래에 사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들 역시 두 종류다. 어떤 사람들은 희망 속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불안 속을 살아간다. 그의 미래는 강력하게 그의 현재와 과거를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하나의 미래가 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군을 전역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도시 속의 순례자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되었다. 회사 안에서, 상점에서,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자신의 삶을 순례하고 있는 사람들을 알아보게 되었다. 현실과 일상의 고통을 인내하며 자기 안에 숨겨진 내면의 빛을 키워나가는 사람들. 그들이 현실을 걷는 건 한 발 한 발이 오체투지의 눈부신 절정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고통을 방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십억 명의 인구가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넘치고 다른 이에게는 부족한 이유,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복지의 사각지대가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 화려함과 세련됨이 넘치는 도시의 거리에서 누군가는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는 이유. 그 모든 이유의 본질은 원죄의 결과나 사회제도의 불완전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게도 멀리 떨어진 고통이 나에게 강렬히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통증을 기준으로 재편된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통증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완화된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비로소 작은 개인을 거대한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있게 한다.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고, 낯선 영화를 보고, 여러 음악을 듣고, 세계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예민한 감수성으로 보편적 윤리와 은폐된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야기. 그것이 세계의 둘레와 경계까지 나의 감각을 확장하고, 결국 세계의 고통을 내가 감지하게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기억들은 나 스스로에 의해 선별되어 마음의 앨범 속에 배열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연의 진실과 뒤섞여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결국 우리를 깨닫게 한다. 나는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나와 세계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나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는 나의 세계의 진실성을 방영할 뿐이다. 그것은 타자의 세계를 재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고, 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모든 이야기가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비롯한 종교, 체제, 이념, 과학적 세계관 전체는 세상의 일부를 기술하는 이야기여서 어쩔 수 없이 배제하거나 은폐하는 부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유한한 개인은 무한한 세계를 자기의 내면에 담아낼 수가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회적 담론 속에 자생적으로 자라난 비합리성이 들어 있다. 종교, 전통, 관습, 윤리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진리 속에 무수히 많은 오해와 우연이 섞여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진리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리의 반대말은 복잡성이다. 거짓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거짓 안에 진리가 섞여 있을 경우, 혹은 진리 안에 거짓이 섞여 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쉽게 제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믿고 있다 하더라도, 너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크기가 너무나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심리적 위안보다 진실의 이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해봐야 한다.
      
         진리는 긍정적인 개념인가? 단정적으로 말하면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인위적으로 제한된 특정한 영역에서는 옳을 수 있지만, 일상이라는 실제 현실에서 진리는 긍정적이기보다는 하나의 폭력으로서 드러난다.
      
         자신이 오랜 시간 직장생활 속에서 배운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입사원에게 분노하는 부장님을 보았고, 자신이 평생 연구한 학문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타과 학생을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수님을 보았으며, 신의 나라를 외치며 불신하는 이들의 심판을 경고하는 종교지도자를 그리고 자신이 평생 걸어온 길이 정의의 길이었다며 지지자와 반대자를 선과 악으로 양분하려는 정치인을 보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세상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생각이 정리될 무렵. 나는 내가 목격한 분노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진리였다. 너무나 확고한 하나의 진리가 세상에 등장하면 그것이 어떻게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전이되는지를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문제는 진리의 개념 자체가 보편성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즉, A는 스스로 진리임을 외치는 동시에 이렇게 믿는다. 모든 것이 A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U=A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문제가 발생한다. U에는 집합 A에 포함되지 않는 이질적인 세계관 집합 B, C, D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에게 이들의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A에게 B, C, D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다만 A의 여집합. 즉 ‘A가 아닌 것들’로 규정된다.
    이제 A에게는 역할과 의무가 발생한다. A가 진리이고 보편이며 전체이기 위해 A가 아닌 것들에 대한 제거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폭력이 가해진다. 폭력은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회유, 유인, 강제, 억압.
      
         우리는 세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나의 세계 안에는 무엇이 있고,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혹시 나는 고집스레 단일한 진리관을 움켜쥐고 빈곤하게도 이것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닌지를. 또한 외부의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단순히 비진리라 규정해버림으로써 그것을 안 봐도 괜찮은 것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던 것은 아닌지를.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이라면 점검해봐야 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생각보다 괜찮은 체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자본주의가 나의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강요한다. 특정 분야의 노동자라는 제한된 역할에 만족하라. 네 전문 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입을 다물고 소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나는 이것이 아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놀지 못하고 관계 맺지 못하고 생각할 줄 모르는, 다만 소비해야 하는 존재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역할은 명확하다. 사유와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 있고, 그것을 다만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여야만 하는 소비자로서의 대중이 있다. 이것은 이상하다. 인문학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또한 질문하고 사유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어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생산자의 역할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누군가 우리 손에 쥐어준 모든 이야기는 친절하게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그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세계를 은폐한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들춰보지 않을 때 세상은 조용하고 평온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내재한 가능성을 끝내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될 권리를 박탈당한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야기는 유익한 도구인 동시에 까다로운 도구이며, 만들어내는 동시에 숨기고 가리는 도구임을.
      
         오해를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사용한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노하우는 천차만별일 테지만, 이를 단순화해보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언어의 양을 늘리는 방향과 언어의 양을 줄이는 방향이다.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장황하게 부연설명을 반복해서 나의 영혼까지 탈진시키는 습관을 가진 사람과, 반대로 충분히 설명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고는 나중에 왜 말귀를 못 알아 듣느냐고 나에게 화를 내는 습관을 가진 사람.
      
         말과 글은 간결해도 충분하다. 꾸미거나 덧붙일 필요가 없다. 수식어를 걷어내고 정갈하게 정돈된 언어를 정확히 구사한다면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나의 언어는 타인의 가슴에 강렬하게 박힌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어를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펴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글을 깨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체험이 필요하다. 독서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한글이 아니라 선체험이다. 우리는 책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우리가 앞서 체험한 경험이 책을 통해 정리되고 이해될 뿐이다.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의 불안은 점차 가라앉고 머릿속의 안개는 조금씩 걷히게 될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당신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체험들의 엉킨 실타래가 풀리며 언어로 정리되기 때문에.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은 고독하다. 이들은 고독 속에서 자기 안으로 침잠해가며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들이 내면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와 기도와 명상과 침묵 안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자들. 아무것도 있을 리 없는 그곳에서 그는 도대체 무엇과 관계 맺으며, 누구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죽음일 수밖에 없다.
      
         어느 비일상적인 때가 되면 젊은이에게도 내면의 목소리는 크게 들려온다. 느슨하던 정신이 깨어나는 때, 오랜 시간 정성들이고 기대하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함과 다급함이 나를 엄습하는 때, 분노와 슬픔 속에서 서늘함을 느끼는 때, 그래서 결국 깊은 고독 속으로 홀로 침잠해야만 하는 때가 도래하면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듣게 된다.
      
         왜 그때는 세상이 그렇게도 거대해 보였는지. 세상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동안, 나는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지 못했고, 그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했다. 행운처럼 주어진 맑은 계절에 함께 걷지 못했고, 흐려지는 날이면 함께 울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 이렇게 생각한다.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잠시나마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름답던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손을 잡고, 서로의 어깨에 기댈 것이다.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두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꿈과 현실이라는 두 가지 세계는 동일한 것일지 모른다. 꿈속에서 마음 썼던 감정들이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처럼, 현실에서 집착하던 감정들은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꿈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 환영인 것처럼 현실도 실제로는 아무런 기반을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세련됨 속에서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위안을 얻는다. 자본주의에 죽음은 없다. 지속적인 성장과 풍요의 약속이 있고,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변함없는 내구성과 영원성을 보장한다. 모든 것은 고장 나기 전에 교체되고, 늙고 병들기 전에 대체된다. 가장 까다로운 인간의 노화와 죽음까지도 병원과 장례식장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처리를 통해 이용자들의 수고와 피로를 대신해준다.
      
         자본주의의 친절한 방해를 넘어서서 오늘날의 현대인이 죽음이라는 탐탁지 않은 대상과 마주해야 하는 이유, 나와 당신이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끝과 소멸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은 나와 타자, 나와 세계가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날이 저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을지 모른다. 노을이 지는 것도, 움켜쥐었던 강물이 손가락 사이를 힘없이 빠져나가는 것도, 정성과 집착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 바람에 야위어가는 것도,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둘 잃어가는 것도 생각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과정일지 모른다.
      
         우리는 타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가 가진 외적 조건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습관을 갖는다.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자는 그의 내면도 훌륭할 것이라 믿고, 험한 일을 하는 자는 그의 내면도 보잘 것 없을 것이라 믿으며, 나에게 고개 숙이는 자는 그의 내면도 나약할 것이라 믿고, 내가 고개 숙여야 하는 자는 그의 내면도 강인할 것이라 믿는다. 그가 입은 옷, 그의 학벌, 직업, 지위, 경제력. 그 외에 우리가 타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눈은 대상의 물리적 표면에만 머물고, 각자가 가진 내면세계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만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부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나쁘고 못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팔라우의 해파리로 태어나겠다고. 누구도 공격하지 않고, 누구도 위협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찬란한 내면세계 속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격정적으로 살아내고 싶었기에.
      
         질문은 숙제가 아니라 열쇠다. 적합하고 정확한 질문은 진리의 빗장을 풀고 우리를 세계의 비밀 안으로 들어서게 한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비용과 오랜 시간을 들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도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그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한다.
      
         ‘나는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사람으로 한정되지 않는 존재, 인간적인 특성을 소거한 다음에도, 생물학적인 특성을 넘어선 다음에도, 그 이후에도 남아 있는 나의 궁극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본질로 향하는 여행의 첫 걸음을 뗄 수 있다.
      
         회피를 멈추고 이제 질문 앞에 서자. 질문의 얼굴은 이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드디어 우리는 인류의 오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관조자다.’
    도대체 이러한 답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복잡함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러한 답변에 도달해야 하는지, 어떤 이는 이해할 것이고 다른 이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궁극적인 질문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열쇠임을 말이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려야만 한다.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빛이다. 그리고 빛은 관조자의 특성이다.’
    반대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조자다. 그리고 관조자의 특성은 빛이다.’
      
         “모든 보는 존재는 충분하고 완벽한 세계를 자기 내면으로 갖고 있고, 그 내면의 빛은 그 존재를 부족함 없이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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