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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4번째 책] 라틴어 수업 (★★★★☆) - 한동일
    1000권 독서 2018. 9. 5. 22:40
     

    책 속의 한 구절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화두와 관련된 깨우침과도 같았습니다. 어미닭과 병아리가 안팎에서 동시에 알을 쪼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안에서 껍질을 쪼아 깨려는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어미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주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미닭은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작은 도움만 줄 뿐,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 자신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병아리만이 아니라 어미닭 역시 배우고 깨닫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어를 빨리 익히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호기심과 애정을 갖는 겁니다. 좋아하면 더 빨리 잘할 수 있습니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 수업이 지향하는 지점입니다.
      
         라틴어가 아시아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인도 유럽어계에 속한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놀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실제로 라틴어는 인도 유럽어의 영향을 받았고, 그중에서도 그리스어, 켈트어, 고대 게르만어와 더불어 서구어를 형성하는 이탈리아어군Linguae Italicae의 영향을 받은 언어에 해당합니다.
      
         라틴어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는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존댓말의 범주 안에서 사용하는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법률적 표현이고, 더 들어가보면 라틴어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하지 마라’ ‘주의해라’와 같은 명령형이 아니라 행동의 주체인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올바른 방법이 모든 표현의 기초가 되고, 그것이 참다운 지적 체계를 형성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한글을 빨리 깨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른 나이에 외국어 교육도 받게 합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은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타인의 생각 또한 이해할 수 없고,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어요.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밀어붙이느라 바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화부터 내는, 서로 저마다 다른 말을 하는 광경을 주위에서 자주 봅니다. 그것은 결국 외국어의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국어로 안 되는 건 외국어로도 안 됩니다. 게다가 모든 언어 공부가 결국 시험으로 귀결됩니다. ‘언어’를 알기는 아는데 그 언어를 ‘제대로 쓸 줄’은 모른다고 해야 할까요?
      
         보통 갓난아기가 ‘엄마’라는 단어를 인지하고 처음 발음하기까지 아기에게 그 단어를 1만 번 이상 들려줘야 한다고 합니다. 유년기에 엄마의 소리는 아이의 뇌 속에 언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영역에 대한 방의 크기를 결정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결정합니다. 아기는 엄마의 말을 통해 뇌의 용량을 늘려나가고 세상을 이해해나가는 것이죠.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언어를 학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공부하지 않고 흡수하는 겁니다.
      
         서로 달리 발음하는 배경에는 역사적, 문화적 자존심이 깔려 있습니다. 로마인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영국과 독일인들은 근대부터 유럽 문화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로마 제국 및 중세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그리스와 로마의 원 문명이 자신들의 근원이라 여기고 고전 발음을 고수하죠.
      
         오늘날에도 이탈리아로 유학 온 독일인들은 서로 소개할 때 이탈리아어로 독일 사람을 의미하는 ‘바르바리코barbarico’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냉소적으로 웃곤 합니다. 독일의 입장에서 로마식 라틴어 발음을 고수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로마의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할 겁니다. 그래서 로마식 발음을 하지 않고 고전 발음을 복원한 것이죠.
      
         라틴어의 발음 하나에도 그 안에는 단순히 언어적 측면만이 아니라, 각 국가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 다양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언어의 습득적, 역사적 성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목적 때문입니다. 언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강합니다. 앞의 강의에서 말했듯이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틀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점을 자꾸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합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할 뿐이죠. 특히 자신의 단점에 대해서는 더 모르는 척합니다. 자신의 약점과 맞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점이나 단점과 직면했을 때 시선을 돌려 자신의 환경에 대해 불평해요. 특히 부모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가장 하기 쉬운 선택입니다.
      
         ‘데펙투스와 메리툼defectus et meritum’. 단점과 장점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라틴어 명사 ‘데펙투스defectus’는 ‘부족하다, 떨어져나가다’를 의미하는 동사 ‘데피치오deficio’에서 파생했습니다. 그리고 ‘데피치오’라는 동사는 ‘데de+파치오facio’의 합성동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메리툼이 오늘의 데펙투스가 되고, 오늘의 데펙투스가 내일의 메리툼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죠. 우리는 무엇 하나 명확히 답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메리툼이고 데펙투스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성찰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곁가지를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내 안의 땅을 단단히 다지고 뿌리를 잘 내리고 나면 가지가 있는 것은 언제든 자라기 마련입니다.
      
         라틴어의 성적 구분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 최우등
      Magna cum laude 마냐/마그나 쿰 라우데 우수
      Cum laude 쿰 라우데 우등
      Bene 베네 좋음/잘했음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잘한다/보통이다/못한다’ 식의 단정적이고 닫힌 구분이 아니라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 학생을 놓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스스로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럽 대학의 평가방식에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다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초라해져본 적 없는 사람보다 타인에게 더 공감하고 진심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과정은 일을 해나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든 일이든 긴장만큼이나 이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그러자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한 자세입니다.
      
         삶이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착각해요.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아무리 공부해도 무능한 노동자’라고 수없이 자기 자신을 책망했던 시간이 머쓱해질 때가 올 겁니다. 결국 공부는 성숙을 배워가는 좋은 과정입니다. 힘들게 공부하는 과정 중에 자기 자신과의 소통을 경험할 수 있어요.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보기도 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지독한 나, 열등한 나와 조우하게 되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성경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신앙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인류 역사상 종교와 신앙의 가치가 최고조에 이른 중세 시대에서조차 성경의 가치만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는 유념하되, 세속의 학문과 연계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후에 한 번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중세 시대에는 하나의 교리와 신조만을 강요했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사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로 확대되고, 이윽고 출판 및 표현에 대한 자유, 집회 및 결사에 대한 자유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지게 되죠. 다시 말해 우리가 오늘날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향유하는 권리는 그 출발이 종교의 자유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건 로마가 정치적으로 동맹관계에 있는 이 국가들에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로마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많은 사법적 권리를 주었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라틴 동맹을 유지시킨 가장 주요한 원칙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도 우트 데스Do ut des’입니다. 직역하면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인데요, 이를 테면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라고 보면 됩니다. 로마가 주변 도시국가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과 동등한 여러 권리를 주었기 때문에 그 국가들이 로마의 정치적 동맹국이 된 것이죠. 쉽게 말해 공짜는 없다는 겁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매듭을 짓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해줍니다. 어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판단하고, 그것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가보는 연습을 해보라고요. 공부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잘 마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이렇게 어려운 라틴어를 공부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과연 몇 퍼센트의 사람이 라틴어를 배우겠습니까? 그걸 생각해보고 자부심을 가지세요”라고 말해줍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떤 사람의 성취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니까요. 결국 누군가의 생각이나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그의 태도에 상처를 받거나 불쾌감을 느낀다면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들을 더는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게 됩니다.
      
         ‘베아티투도beatitudo’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행복’을 뜻하는 단어인데 ‘베오beo’라는 동사와 ‘아티투도attitudo’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베오’는 ‘복되게 하다,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아티투도’는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즉 ‘베아티투도’라는 단어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복을 가져올 수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단어가 유독 마음에 남는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 때문입니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데우스 논 인디제트 노스트리, 세드 노스 인디제무스 데이.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난 뒤부터 신을 경배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이 단순히 강력한 절대자에게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냉혹한 체제와 부조리한 가치관으로부터 고통받는 삶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초기의 인류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신神적인 것에서부터 ‘유추analogia’하려고 했던 것이죠.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인간이 원하고 목표하던 사회적 지위나 명망을 취한 뒤 느끼는 감정은 만족이 아니라 우울함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허무함을 느낍니다. 대중의 갈채와 환호를 받는 연주자나 가수가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법의학 교수님은 이 문장을 말하면서 연예인들이 쉽게 향정신성 의약품에 노출되는 환경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거다’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려갔다가, 막상 이루고 나서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달려본 사람만이 압니다. 또 그게 내가 꿈꾸거나 상상했던 것처럼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만큼 불필요한 집착이나 아집을 버릴 수도 있어요. 그만큼 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겁니다.
      
         고대의 우편 제도는 국가 권한의 일환으로, 특히 국가 안보와 직결하여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로마 시대 우체국은 황제가 신임하는 집정관의 감독 아래 있었습니다. 통치권 행사와 집행을 위해 황제의 칙령을 수도 로마에서 각 속주로 발송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수단은 말이었습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내가 잘 살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요즘 우리의 삶이 위태롭고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의 사고가 어느새 그렇게 변해버린 건 사람들의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낼 여유가 점점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함께cum’하고 ‘더불어cum’하는 걸 즐거워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함께’와 ‘더불어’의 가치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여행을 가더라도, ‘함께’하고 ‘더불어’하는 일에 무심하고 귀찮아하지 않길 바랍니다. 내 작은 힘이나마 필요한 곳엔 ‘더불어’ ‘함께’ 하겠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주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삶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지금보다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요?
      
         인간이 나무와 다른 것 중 하나는 살아 있는 동안 향기롭지 못하다면 죽어서도 절대 향기로울 수 없다는 점일 겁니다. 가식적이고 인위적이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살다가는 죽어서도 악취만 내뿜는 존재가 될 거예요
      
         Hodie mihi, cras tibi
      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문구입니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카르페 디엠’은 원래 농사와 관련된 은유로서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B.C. 8)가 쓴 송가頌歌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시구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호라티우스가 속했던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들이 추구한 쾌락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 다시 말해서 충만한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의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도 당장 눈앞의 것만 챙기고 감각적인 즐거움에 의존하여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경구입니다.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오늘을 소모하죠. 기준을 저쪽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그때보다, 그때 그 사람보다, 지난번 그 식당보다, 지난 여행보다 어떤지를 이야기해요. 나중에, 대학 가면, 취직하면, 돈을 벌면, 집을 사면 어떻게 할 거라고 말하죠. 재미있는 것은 우리만 그런 건 아니라는 거예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매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10대 청소년에게도, 20대 청년에게도, 40대 중년에게도, 70대 노인에게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이고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이에요
      
         Tempus fugit, amor manet.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시간이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오래도록 스툴투스 에스로 남지 않으려면 멍청한 누군가가 겉으로 내뱉는 말 뒤에 숨은, 가슴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나는 정작 사랑을 빼고 무엇을 남기려고 하는 것일까?
      사랑이 빠지면 그 무엇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까?
      나는 무엇을 남기려고 이렇게 하루를 아등바등 사는가?
       
      
         이탈리아어나 독일어 등의 유럽어가 이러한 수평적 언어가 가능한 것은 바로 라틴어 덕분입니다. 라틴어의 많은 어법 가운데 특별히 접속법은 화자나 글쓴이의 바람, 생각과 추측, 가정과 희망, 조건과 권고를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라틴어의 접속법이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바로 법조문인데요, 로마법의 조문은 ‘~을 하지 마라’는 식의 직설법적 표현이 아니라 ‘~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가시기 바랍니다’ 등의 완곡한 접속법적 표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정복지의 주민조차 로마를 공동의 조국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애초부터 빈 밥그릇마저 주어지지 않는 불공정한 게임이라면, 또 청년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양을 채우기도 빠듯하거나 부족하다면 그들의 절망은 고스란히 사회에 대한 분노로 차곡차곡 쌓일 겁니다. 우리는 북유럽 사회를 부러워만 하지 그들이 미래 세대에 투자하는 제도적, 사회적 노력은 간과합니다. 봄날에 산에 가서 나무를 보면 모든 에너지와 역량을 나무의 가장 끝인 꽃과 이파리에 몰아줍니다. 자연은 그렇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미래 세대에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하늘의 새를 보세요. 그 어떤 비둘기도 참새처럼 날지 않고, 종달새가 부엉이처럼 날지 않아요. 각자 저마다의 비행법과 날갯짓으로 하늘을 납니다. 인간도 같은 나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고 저마다의 날갯짓이 있어요.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정확히 모르는 내 걸음의 속도와 몸짓을 파악해나가는 겁니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 독일의 수도자이자 종교사상가
      
         그리스인은 과음만 하지 않는다면 포도주는 영혼의 해방자이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적 자아에 더 깊이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영향 때문에 로마인도 똑같이 포도주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조주의 신성함은 먼 옛날 그리스인이 디오니소스라고 부르고 로마인이 바카스라고 부르던 술의 신에 대한 경배와 연결됩니다. 그 뒤 포도주는 필수적인 음식으로 여겨져 노예들에게도 하루에 1리터 정도를 배급했습니다. 반면 맥주는 북부 게르만족의 수입 음료였고, 과실주를 선호한 로마인들은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Tantum vemus quantum scimus.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사람마다 자기 삶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고,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 잊지 못할 장소일 수도 있고요. 그 책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그림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장소를 만났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겁니다.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성경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절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중세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를 변함없이 인정하고 유념하면서도 세속의 학문과 연계해서 문제를 풀고자 했어요. 이것이 유럽에서 대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저는 ‘기억memoria’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늘에 갔을 때 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할까?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몇 날 몇 시에 내가 저질렀던 인간적인 실수들과 교회가 말하는 죄를 읊으며 나를 판단할까?’ 하지만 저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제 기억을 기준으로 물어볼 것 같았습니다. 이 땅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불편하게 품고 간 기억과 아픔들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생에서 삶의 기억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절실히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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